중은우시 2009. 5. 8. 10:58

: 동원거사(桐源居士)

 

20세기초의 중국사회는 복잡다단했다. 한편으로는 낙후된 생산관계와 연이은 재난으로 백성들의 삶은 고달펐고, 다른 한편으로 부패한 상부구조와 군벌할거의 혼란국면이 이어졌다. 혼란한 난세에 역사는 때로 뒷걸음질치기도 하고 반복되기도 한다. 90여년전의 어느 봄날, 손중산과 중국의 대다수 선량한 사람들은 원세개를 선택했다. 그 선택은 중국에 다시한번 전진하는 길에서의 반복을 가져왔다.

 

중국의 최근 100년이래의 지도자들 중에서, 원세개는 집권기간은 비록 짧았지만, 선명한 특색과 논쟁거리가 많은 경력으로 빠트릴 수가 없다. 그를 좋아하든 아니든, 그는 어쨌든 일국의 국가지도자였고, 한때 83일간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인물이다. 역사학자는 악명을 얻은 원세개의 시비공과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다. 필자가 그를 연구하고자 한 것은 그의 역사적공적때문이 아니다. 더더구나 그를 명예회복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오히려 풍수적인 문제때문이다.

 

원세개는 중국의 백년역사상 회피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에 대한 전설은 아주 많다. 지금까지도 사람들 사이에서 얘깃거리가 되고 있는 것에는 원세개의 미신과 황제즉위가 있다. 원세개가 천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제에 등극한 것은 중요한 원인이 그가 자신의 풍수를 믿었다는데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명리(命理)와 관상이 비범했다는 것도 작용했다. 많은 역사자료는 원세개가 황제에 즉위한 것은 미신과 큰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항성(項城)은 중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문화적인 전통이 깊은 곳이다. 상명(相命), 감여(堪輿,풍수), 무술은 당시사회에 아주 성행했었다. 원씨집안은 상명지술(相命之術)을 믿었다. 1909년 원세개가 섭정왕 재풍에 의하여 요양의 명의로 고향으로 쫓겨와 창덕(彰德)에 은거하고 있을 때 더더욱 상명, 풍수에 깊이 빠졌다. 원씨집안의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단명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통계를 내본 적이 있는데, 최대한의 수명이 57세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현지의 유명한 상명대사(相命大師)가 원세개에게 58세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원세개는 조급해져서 반문했다: 무슨 푸는 방법이 없겠는가? 그러자 그 대사는 어렵다. 다만 용포를 입게되면(龍袍加身) 풀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원세개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중에 몰래 사람을 보내어 그 상명대사를 죽여버렸다.

 

원세개로 하여금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촉구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원세개는 총통부내에 깊이 틀어박혀 있어서, 그의 부하와 친지들이 그의 눈을 가렸다(그도 이렇게 눈이가려지는 것을 즐긴 것같다). 친구인 양도는 대거 군주입헌이 중국에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하면서, 공화제는 중국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부하들은 속속 원세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요구했고, 호소문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양사이(梁士), 주계검(周啓鈐), 주자제(朱自齊)등의 관리들은 각성의 인민청원단을 조직하여, 군주제를 옹호하였다. 북경에는 상회청원단, 인력거청원단, 걸개청원단, 기녀청원단등이 조직되었다.

 

원세개가 황제에 오른 것은 개인의 주관적인 망상이 그 근원이다. 미신은 그 촉진제였다.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랫사람은 그에 영합한다. 북경은 짧은 시간내에 황제복벽을 둘러싸고 연이은 해프닝들이 벌어지게 된다.

 

미신으로 인하여 구오존상(九五尊相)이라는 자기암시에 빠진 것은 원세개로 하여금 황제에 오르도록 만드는 심리적인 요소였다. 1909년 봄, 원세개는 유배지에서, 허장의(許長義)에게 자기의 명을 보아달라고 부탁한다. 봉사인 허장의는 원세개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는 신해년 8월에 운세가 바뀌고, 관직이 더욱 높아진다고. 신해년 팔월(1911 10)에 무창의거가 발발하고, 원세개는 다시 동산재기하여 내각총리가 된다.

 

원세개는 자기의 성취를 시대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총통이 된 후에는 더더욱 상명선생, 풍수도사들에게 빠졌다. 1913년에서 1914년의 사이에만, 그는 가흥련(賈興連), 장진룡(張振龍), 곽삼위(郭三威), 장효초(張曉初)등에게 자신의 명을 봐달라고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용흥지운(龍興之運, 용이 일어나는 운세, 즉 황제가 되는 운)이 있는지를 봐달라고 했다.

 

집안사람들과 종복들도 가짜미신으로 천의를 조작했다. 차동(茶童)이 잠을 자는 원세개를 보고서는 금룡의 화신이라고 얘기한 사건을 제외하고도, 여러 건의 원세개가 황제위에 오르게 하기 위한 미신의 징조들이 나타난다. 1914, 멀리 하남성 항성의 원씨조상묘를 지키는 묘지기 한성(韓誠)이 황급히 북경으로 올라와서 보고를 하는데, 원세개의 생부인 원보중(袁保中)의 묘옆에 야간에 수시로 붉은 빛이 나타나는데, 그 모습이 횃불과 같으며, 사방을 비춘다고 했다. 이외에, 원씨의 조상묘부근에는 자등수(紫藤樹)가 자라는데, 그 모습이 웅크린 용과 같고, 길이가 1장이 넘는다고 했다. 조상묘의 부근에서는 또한 천명유귀(天命攸歸, 천명이 귀속된 곳)라는 글자가 새겨진 돌이 나왔다고도 했다. 원세개는 그 말을 들은 후에, 그 묘지기에게 큰 상을 내리고 절대 외부인들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재삼 당부했다. 원세개는 장남 원극정을 고향에 보내어 진실여부를 확인해보게 시킨다. 원극정은 항성에서 서신을 보내어 이렇게 보고한다: 등나무가 아주 빠르게 자라고 있으며, 굵기가 어린아이 팔뚝을 넘어섰으며, 색깔이 붉은 피빛입니다. 천명이 귀속된 상서로운 증거가 아닌가 합니다 원세개는 그 편지를 받고 아주 기뻐한다. 서신을 보내어 아들에게 현지에서 묘지기를 모집해서 담장을 쌓아서 보호하며, 소나 말이 밟고 다니지 못하게 하도록 시킨다. 당시 북경성의 한 천문학자도 원세게에게 글을 올리는데, 그가 여러날 밤에 천상을 연구했는데, 삼경이후에 제성(帝星)이 어느 위도를 비추는데, 자세히 조사해보니 바로 하남성 항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 제성이 이미 북으로 오고 있으니, 1달 후면 북경에 도착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하늘이 내리는 뜻이니 황제에 오를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여러가지 분위기를 조성하자, 원세개는 황제에 오르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황제에 오르는 것이 천명에 따른 것이라면, 얼마나 오랫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원세개는 곽삼위(郭三威, 郭陰陽이라고도 함)에게 그의 조상묘를 관찰하게 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용흥지운의 연수는 얼마인가? 곽삼위는 한동안 계산해본 후에 대답했다: 만일 황제에 오른다면 팔이지수(八二之數)입니다. 원세개는 다시 묻는다: 이는 820년인가? 82년인가? 아니면 82개월인가? 곽음양은 이렇게 대답한다: 황제위에 얼마나 오래 있을 수 있는가는 나중에 스스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 천기를 누설할 수 없습니다

 

원세개는 혼자서 생각해본다. 자신의 왕조가 820년이나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다고 82개월밖에 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82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3대는 내려간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황제위에 도전해보는 것이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세개는 황제위에 오르자마자 전국 백성들의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 겨우 83일간 홍헌황제로 있다가 죽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