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대학 "삼각지(三角地)"의 역사
작자: 미상
2007년 11월 4일 10:00 북경대학 "삼각지"의 공고란(海報欄)이 철거된 후의 넷째 날이다.
두 명의 용접공이 막 이 삼각형의 녹지에 쇠난간을 설치하고 있었고, 용접불꽃이 녹지로 튀고 있었다. 바로 앞에는 5센티미터 깊이의 시멘트로 만든 홈이 있었다. 이곳에는 아마도 전자공고판이 들어설 것이다. "삼각지" 북측의 백년대강당(百年大講堂)의 대형 전자모니터에는 올림픽이 278일 남았음으를 보여주고 있다. 서쪽의 신화서점에는 두 명의 점원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내다보고 있다. 아침일찍 공부하러 가는 학생들은 지지직 하는 소리와 뛰는 불�에 발걸음을 빨리해서 지나간다.
북대 "삼각지"의 공고란은 이미 철거되었고, 조용한 것같다. 그러나, "삼각지"의 바깥에는 그리워하고, 기념하며 평론하는 글들이 인터넷에 넘쳐나고 있다. 공동의 역사기억을 지니고 있는 공고란의 철거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잡한 느낌을 주고 있다.
많은 사람에 있어서, "북대삼각지"는 기억에 깊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전리군(錢理群)과 같은 경우에는 철거된다는 말을 듣자마자 68세인 그는 쇼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면 앞으로 모든 소식은 먼저 학교의 심사허가를 받아야만 하는가" 그리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원자리에 앉으면서, "그렇다면 더 이상 삼각지가 아니지."라고 하였다.
1980년대초, 북대인들은 "삼각지"의 곁에서 해정구인민대표대회를 뽑기 위한 연설회가 있었는데, 전리군은 언론자유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표를 던졌다. 그는 "삼각지" 공고란이 철거된 후, 전자모니터에 나타나는 글은 모두 검열을 거친 것으로 될 것을 우려했다.
확실히 전리군의 입장은 한때 영광스런 세월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현재의 북대인들은 당시 상황을 모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월은 전리군의 몸에 많은 흔적을 남겼고, 이런 흔적이 집적된 감정이 없다면 깊이 느낄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백가쟁명, 백화제방"의 정신하에, 북대학생들의 격정을 폭발했고, 장원훈과 심택의의 시인 <<때가 되었다>>가 도화선이 되어, 학생들은 밤낮 할 것없이 대자보를 붙이고, 논쟁하고, 질의하며, 옹호했다.
전리군의 기억속에 "주전쟁터는 대식당의 민주벽(民主墻)이었고, 그 서남쪽에 있던 '삼각지'는 장소가 너무 좁아서, 그저 보조전쟁터의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 "조연"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주연"으로 변모했다. 중문과 2학년이던 전리군은 민주벽에 쓰여진 글들은 알듯 말듯했다. 그는 흥미를 가지고 이 대자보를 문학작품으로 생각하고 감상했다. "당시, 누구든지 민주벽에 글을 발표할 수 있었고, 방청자들도 언제든지 질의하고 변론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후, 반우파운동이 개시되면서 격정은 점차 약해졌다. 대식당과 '삼각지'도 옛날의 평정을 되찾아 갔다.
전리군이 두번째로 북경대학에 들어와 연구생으로 있을 때, 시대는 이미 10년혼란을 지난 뒤었다. 1978년 9월, 그와 같은 기에 입학한 신입생들은 대부분 이미 청춘은 아니었다. 이들은 농촌에 내려가기도 하고, 노동자로 일하기도 하고, 청소일을 하기도 했던 청년학자들이었다. 마치 오랜 가뭄끝에 비를 만난 것처럼 밤낮으로 책을 읽었다.
중앙미술학원 인문학원 부원장인 서천(西天)은 1981년에 북경대학에 입학했다. 주위의 학생들이 모두 '글자만 있으면 몰려가서 읽곤 했다" 당시 북대는 숙사동마다 텔레비전방이 1개 있었고, 신문잡지는 아주 적었다. 학생들이 반드시 지나가는 길목에 있던 "삼각지"는 당연히 학생들의 캠퍼스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일부분이었다.
매번 "삼각지"를 지날 때마다, 이 캠퍼스의 시인은 자전거에서 뛰어내려, 낡은 자전거를 끌고, 공고판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최신 인문강좌, 사단(社團, 동아리) 소식과 학술논쟁을 보았다. 대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학생들은 밥통을 들고, 걸어서 공고란앞에까지 와서 글을 읽으면서 밥을 먹었다.
바로 이때, "삼각지"는 그의 가치를 한 단계 더 확립하기 시작하였다. 점차 북대정신의 상징이 되어간 것이다.
어ㄸ너 평론에서는 1978년 대학입시가 회복된 후, 우수한 졸업생들이 미명호변에서 고민하고, 남문 기숙사안에서 논쟁하고, 사상의 불꽃은 최종적으로 '삼각지'에 모였다. 이런 공공공간은 대학의 영혼의 상징이다. 역사적인 의미를 말하자면, 중국이 현대문명으로 발전해가는 불가결한 요소였다. '불가결한 요소'는 일정한 의미에서 이 대학의 사람들의 국가에 대한 감정과 민주자유정신에 대한 전승을 의미한다.
1980년, 중앙정부에서는 기층민주개혁실험을 시작한다. 각 대학교 학생들이 자유롭게 해정구인민대표를 뽑을 수 있도록 했다. 수십년간 정치풍운을 겪은 '삼각지'는 정치의 열정이 다시 불타 올랐다.
전리군에 따르면, 후보자들은 각자 '삼각지'의 앞에서 경선선언, 개혁요강을 발표하고 선민답변회도 열고, 여론조사도 했다.
참여자가 수천에 이르렀으므로, 선민답변회는 '삼각지'의 곁에 있는 옛강당에서 시행되었다. 후보자들이 토론하는 주제는 구인민대표의 권한범위를 한참 벗어났다. '문혁'부터, 사회주의에 대한 재인식, 중국개혁의 길, 인간해방등에 걸쳐 있었다.
이전에 얘기한 것처럼, 전리군은 고민끝에 언론자유를 주장하는 학생에게 표를 던졌다. 이 주장은 바로 당시 북대학생들에게서 가장 큰 시장을 가지고 있는 요구사항이었다. 결국 이 후보자는 3647표의 절대다수로 당선되었다. 1980년대, 삼각지는 '정치'와 더욱 연결되어 있었다.
'정치'를 제외하고, 서천에게 가장 인상깊은 것은 1980년대중엽, 중국의 첫번째 행위예술이 공연된 것이다.
그날 정오, 몇명의 젊은이들은 긴 사다리를 타고, 삼각지 곁의 학삼식당에 기어올랐다. 나무판의 뒤에서 아래로 의복을 벗어던졌다. 지나가던 학생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의복을 벗어던진 후, 몇명은 나무판 밖으로 걸어다녔다. 여학생들은 고개를 숙이고, 남학생들을 올려보았다. 그들은 수영복팬티를 입고 있었다. 이어서 이 전위적인 문화예술학생들이 깜짝 놀란다. 무슨 일인지 식당의 주방장이 사다리를 치워 버렸기 때문이다.
북대의 청년교수 맥과(麥戈, 가명)는 1991년 중문과에 합격했다. 처음에 '삼각지'에 갔을 때는 '54'문학사의 신입생모집공고가 눈을 끌었다. 크라프트 종이에 몇개의 42호 신발자국을 찍고, 곁에는 몇구의 해자(海子)의 시를 갈겼다. '분노청년의 모습'이었다.
나중에 그는 그 문학사의 대표가 되었을 뿐아니라, 연이어 몇 개의 동아리도 열었다. 거의 매일 '삼각지'에 가서 글을 붙였다.
그에게 가장 느낌이 큰 것은 갈수록 많아지는 상업광고가 동아리와 '삼각지'의 자리다툼을 벌이게 된 것이다. 각종 시험준비정보, GRE와 TOFEL학습반이 가득 차게 되었다. 이들은 한 시기를 대변한다. 1990년대초, 북대학생동아리는 정치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이상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그들은 점차 현실화된다. 그리고 해외로 나가기로 결정한다. 출국은 유행이 되었고, 북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조류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절(李折, 가명)은 1994년 북대에서 대학원을 다녔다. 지금은 남방의 어느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다. 이의 회고는 이 시기를 잘 보여준다. 당시 캠퍼스의 분위기는 아주 많이 바뀌었다. 시험보고, 출국하는 학생들이 점차 늘어갔고, 그 후에는 인터넷, 인터넷게임, 해적판DVD가 캠퍼스에 유행했다.
'삼각지'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똑같은 공고란이지만 왕년의 '정치'적인 분위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일부 북대인들은 생명처럼 생각했던 기억이 또 다른 일부 젊은 북대인들에게는 이미 모호해져 버린 것이다.
삼각지 공고란이 철거된 후, 맥과는 학생들에게 어떤 생각이 드는지 물어보았다. 젊은 대학생들은 밥을 먹으면서 대답했다. 삼각지의 상업광고는 엉망진창이어서 학교 이미지에 해를 끼치지 철거하는게 좋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깜짝 놀랐습니다. 벌떡 일어나서 욕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습니다" 그러나, 곧 안정을 되찾았다. "내가 슬퍼하는 것은 나의 청춘의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전리군에 따르면, 이런 학생들이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평화롭고 먹고입는데 걱정이 없었던 세대이며, 어려서부터 시험준비교육을 받아서, 공부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걱정이 없는 데대이다. 그래도 전리군은 이들에게도 사회책임감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으며, 그저 숨어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인상이 가장 깊었던 것은 나토군이 유고중국대사관을 포격했을 때이다. 북대학생들은 앞장서서 항의서를 제출했고, "삼각지"에 추모당을 만들어, 무고하게 죽은 자들을 추도했다. 분노에 가득한 얼굴을 보면서 당시 58세이던 전리군은 세월이 10년은 거꾸로 흐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당시 대단했던 항의는 이절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이미 미디어에서 일한지 여러해된 '진보청년'에게 있어서 그의 이상주의와 현질에 대한 관심은 이미 인터넷에서 자리를 잡았다. 당시 인터넷은 막 캠퍼스에 보급되어서, 모두 인터넷에 사이버추모당을 만들어놓고, 촛불을 밝히고, 헌화를 했으며, 여행노선을 협의했다.
"삼각지의 정보공개와 교류기능은 이때에 이르러 인터넷으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2001년에 입학한 전우(田雨, 가명)는 두가지 경우에만 '삼각지'에 간다. 하나는 매일 수업을 들어러 가고 수업이 끝나서 지나갈 때이고, 다른 하나는 친구가 와서 북경대학을 구경시켜줄 때이다.
"지금은 상징적인 의미밖에 없습니다" 캠퍼스의 동아리공고, 강좌정보등은 기본적으로 모두 BBS에 나온다. '삼각지'에 남겨두는 것은 1980년대의 정치도 아니고, 1990년대의 선봉예술도 아니다. 거의 모두 시험대비, 기숙자자리양도정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전의 "삼각지"와 관련이 있던 시자림(枾子林), 대식당은 북경대학이 개교100주년기념행사를 준비하면서, 낡았다고 하여 모두 철거해 버렸다. 북경대학은 그가 위치한 북경과도 같이 오래되고 낡은 흔적은 천천히 말살되어버리고, 새롭고 '현대화'된 건축물이 들어서고 있다.
이곳은 또한 올림픽과도 인연을 맺어서, 백년대강당, 건설중인 올림픽탁구경기장, 마라톤코스등이 지나가서 "삼각지"의 잡다한 광고물이 붙어있는 공고란은 더욱 돋보였다.
5.4정신을 따라 북경대학에 입학한 전우는 입학후 얼마되지 않아, 많은 뜻이 맞는 선배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들의 말과 그들이 만든 전단에서 삼각지의 과거를 천천히 이해하게 되었다. '이들 이슈는 아주 소수그룹화되어 있으며, 나는 반학생들과는 거의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전우에 따르면, 그녀와 같은 나이에서는 소수파에 속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동창들은 이해하지도 못하고, 과거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다. "우리 세대는 사이버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서적, 영화, 신문, 오락, 논문도 모두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시험, 출국, 구직등이 우리의 대부분의 시간을 잡아먹는데, 과거에 누가 관심을 두겠습니까"
11월 4일, 북경의 모 매체에 근무하고 있는 전우는 모교에 돌아가서, '삼각지'에 백장미 한 송이를 바쳤다.
'삼각지' 공고란이 철거되는 과정을 바라본 사람은 얼마되지 않는다. 인터넷의 유저네임이 peaceyoa인 북경대학학생은 10월 31일 오전 7시, 강좌광고전단을 들고 '삼각지'에 도착했을 때, 이미 빈터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할 수 없이 광고를 근처의 전신주에 붙일 수밖에 없었다.
급히 수업을 들으러 가는 학생들 중에서 '삼각지'의 변화를 눈치채고 이 괴이한 광고전단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시간에 맞추어 강의실로 달려갔다. 10월 31일부터, 북경대학측은 전체학생에게 학생증 혹은 교원카드를 반드시 휴대하여야 강의동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밝혔다. 학생증이나 교원카드가 없으면, 강의동에 들어갈 수 없다. 11월 5일 아침 8시, 강의동의 문은 정확히 잠겼다.
요 며칠동안 북경대학 미명BBS에는 많은 학생들이 글을 올렸다. 매일 '삼각지'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그러나, 비어있는 '삼각지'는 평안무사했다. 전우가 헌화한지 얼마되지 않아, 또 다른 네티즌이 헌화했다. 그러나, 금방 헌화된 꽃을 치우는 학교직원의 뒷모습이 눈에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