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개의 묘지에 얽힌 이야기
글: 중화유산 잡지(2007. 7.)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를 얘기하면 모두 그를 난세의 간웅과 비슷한 나라를 훔친 큰 도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아는 사람이 적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가 조조와 마찬가지로, 여러 곳에 묘지를 만들어놓았다는 전설아닌 전설을 퍼뜨리기도 한다...아주 신비스럽게 들린다. 그러나, 기실, 원세개는 바로 하남성 안양(安陽)의 원수(洹水)의 가에 묻혀 있다.
원세개의 고향은 하남성 항성(項城)이다. 그런데 왜 그는 안양에 묻혔을까? 원세개는 생전에 그에 대하여 명확히 설명하지 않아서, 근대의 사학자들은 그저 추측할 수밖에 없고,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일찌기 원세개가 은거한 것은 1910년 겨울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위하여 묘지를 골라두었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로 정했는지에 대하여는 명확치 않다. 1911년 6월 그는 단방(端方)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형(원세개)의 병이 날로 심해지고, 걷는 것도 불편하다. 나중에 누워서 쉴 장소를 겨울에 가서 이미 한 곳 찾아두었다" 그의 아들인 원극문의 기술에 따르면, 원세개가 스스로 정한 묘지는 태행산(太行山)에 있다고 한다. "예전에 공께서 원(洹)에 머무실 때, 일찌기 스스로 묘지를 찾아두었는데, 태행산에 있고, 높고 탁트여 있어서 영원히 안식할만한 장소이다" 원세개의 후인들이 어디에 묻을 것인지를 논의할 때, 원극문은 부친의 생전의 뜻에 따라 처리하자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장남인 원극정이 극렬히 반대했고, 결국 매장지를 창덕부 원상촌 옆으로 정하게 되었다.
원세개가 항성에 묻히지 않은 이유에 관해서는, 그의 신세내력과 집안 일과 관련이 있다는데 비교적 의견이 일치한다.
청나라 함풍9년(1859년) 원세개는 하남성 항성현 원채(袁寨)에서 태어났다. 그들의 집안은 "보(保), 세(世), 극(克), 가(家)"를 돌림자로 써서 배분을 나누었다. 부친인 원보중(袁保中)은 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장남인 세창(世昌), 차남인 세돈(世敦)과 두 딸은 정실부인 소생이다. 나머지 4명의 아들은 모두 서출인데, 원세개는 사남(四男)이었다. 그리고, 7살때 숙부인 원보경(袁保慶)의 양자로 입적했다. 원세개가 산동순무를 지낼 때, 그의 모친인 유씨는 천진에서 병사했고, 영구를 항성으로 운구했는데, 원세개의 동부이모형인 원세돈이 적자의 신분으로 집안 일을 주재하고 있었다. 그는 유씨가 정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정문으로 관을 내갈 수 없다고 주장했고, 영구도 조상묘의 정혈에 원보중과 합장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원세개는 당시 권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집안의 윤리도덕문제에 대하여는 어떡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형과 싸우고, 심지어 무릎을 꿇고 애원해보기도 하였지만, 원세돈은 허락하지 않았다. 원세개는 결국 별도로 묘지자리를 사서, 모친을 매장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원세돈과는 의절하였고, 다시는 항성의 고향집을 돌아가지 않았다.
직로(直魯, 하북성과 산동성)의 인후를 차지하고, 평한철로(平漢鐵路, 북경-무한간 철도, 당시 북경은 북평이라고 불렀음)가 지나가는 중심도시인 안양은 원세개의 관료생애에서 풍수길지라고 할 수 있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원세개는 일찌기 과거에서 여러차례 낙방하였고, 나중에 군대에 들어가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의 정치생애의 전환점은 청일전쟁후에 천진의 소참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킨 때였다. 이때부터 그는 관운이 형통하여 무술변법의 다음 해에는 산동순무가 되었고, 나중에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이 되었으며, 대청조정의 권력중추가 되었다.
1905, 1906년 북양육군은 연속 2년동안 대규모의 군사훈련을 실시했고, 그중 1906년 9월의 훈련은 창덕에서 시행한다. 원세개는 열병대신이었다. 이번 훈련은 직예양호(직예 즉 하북성과 호남/호북)의 육군실전훈련이었다. 정선해서 참가한 북양관병이 4만여명이었고, 각국의 주중국대사와 기자500여명이 참가했다. 이것은 청일전쟁이래 북양군대로서는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원세개는 자기의 고향부근에서 이름을 크게 드날릴 수 있는 기회였다. 이제 그는 조정의 동량대신이 된 것이다.
1908년, 광서황제와 서태후가 연이어 사망했다. 원세개와 갈등이 있던 순친왕 재풍이 섭정을 하게 되면서, 그는 원세개의 모든 직위를 박탈하는 조서를 내리고, 원세개로 하여금 고향에 돌아가서 요양하도록 명한다. 원세개는 원세돈과 의절한 이후로, 창덕을 자기의 고향으로 생각했다. 이곳은 하남성과 하북성이 만나는 곳이며, 교통이 편리했고, 북경에서 비교적 가까웠다. 원세개가 어렸을 때, 안양의 원상촌을 알았다. 전해지는 바로는 상나라의 명재상인 이윤(伊尹)이 다른 사람의 비난을 받고는 원상촌에 3년간 은거했었다고 한다. 나중에 상왕이 친히 원상촌에 와서 그를 맞이해 갔다고 한다. 안양도 원세개의 먼 조상인 원소(袁紹)가 흥기했던 곳이다. 원세개는 원상촌은 자신에게 풍수길지라고 생각했고, 소참에서 병사훈련시킬 때 그는 이 곳의 200여무의 토지를 사두었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그 땅을 쓸 줄은 생각지 못했었다.
원세개는 천하의 금기를 어기고 "황제"를 칭했다. 그러나, 명분이 없어, 사방의 공격을 받고, 결국 60세도 되지 않아 죽게 된 것이다. 그의 묘는 "능(陵)"이라고 부르지 않고, "림(林)"이라고 부른다.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든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원세개의 큰아들인 원극정은 역대제왕을 본떠 자기 부친의 묘지를 "원릉(袁陵)"이라고 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너라,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세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서세창은 "항성(원세개)는 생전에 황제를 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이미 홍헌연호가 취소되었는데, 만일 원릉이라고 이름을 짓는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임(林, Lin)이 능(陵, Ling)과 발음이 같고, <<설문해자>>에는 능과 임의 두 글자를 서로 빌려 쓸 수 있도록 되어 있으니, 능이라는 이름은 피하고, 능이라는 실질을 갖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자고이래로 제왕릉은 능이라고 하고, 성인의 묘는 림이라고 한다. 원세개가 "공림(孔林, 공자의 묘)" "관림(關林, 관우의 묘)"를 본떠, "원림"으로 불렀으니 교묘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원림은 안양시 원하의 북쪽 강안에 있다. 당시 이 곳에는 숲이 무성했기 때문에, 원림이라는 이름과 명실상부했다. 그러나, 1930년대 일본군이 이 곳에 비행장을 만들면서, 원림의 격국은 많이 파괴되었다. 해방전쟁시기에 등유대군(등소평, 유백승)이 안양으로 다가올 때, 국민당군대는 원림의 나무를 베어서 방어공사를 했다. 원림의 고요한 환경은 이로써 다시 한번 파괴되었다. 해방후 모택동이 "남겨서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지시로 인하여, 원림은 문혁때의 재난을 벗어날 수 있었다. 개혁개방후에는 면모를 다시 바꾸어 능묘건축의 보존상태도 좋다. 원세개의 손자이며, 저명한 물리학자인 원가류(袁家[馬+留])가 이 곳에 와서 절을 하면서도 감격을 금치 못했다.
원림에 온 사람들은 먼저 능입구에 새워둔 거대한 조벽(照壁)에 깜짝 놀란다. 이 조벽은 녹색유리기와등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었고, 60여미터에 이른다. 중국에 남아 있는 최대의 벽돌조각조벽이다. 신도북쪽에는 6 기둥의 패루가 있다. 중국의 전통능묘에서는 아주 보통인 건축물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패루는 전석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강철콘크리트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꽃조각이나 기둥꼭대기의 "망천후"도 시멘트조각이다. 이것도 아주 드문 경우이다. 이처럼 중국-서양이 결합되고, 토착-외국이 결합된 예는 원림의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것은 묘주인의 시대적인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신도의 양켠에 서 있는 6개의 망주(望柱)를 보면, 그 위에 창룡, 맹호와 같은 민족적인 것들이 늘어서 있다. 바로 석사자, 석마, 문무옹중(文武翁仲)등이다. 이런 조삭은 아주 뛰어나고, 잘 만들었다. 그러나, 모양은 아주 유머스럽다. 조형이 서양도 동양도 아니며, 전통적인 것도 전통적이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한쌍의 문관은 몸에는 9개의 단화가 있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예복을 입고 있는데, 머리에는 면류관묘를 쓰고 있고, 손애는 황제를 만날 때 드는 홀을 들고 있다. 특히 무장은 구군벌복장을 하고 있고, 몸에는 북양군벌의 옷을 입고, 머리에는 속영군모를 쓰고 있으며, 손에는 동양도를 들고 있는데, 그 모습은 그대로 원세개이다.
중국식의 대전을 지나가면 원세개의 묘지가 나온다. 원형의 분묘는 미국대통령 그란트의 예를 본떠서 만들었다. 전체는 강철콘크리트로 만들었고, 틈이 있는 곳에는 쇳물을 부어서 아주 견고하다. 문혁때 홍위병들이 원세개묘를 폭파시키고자 하였는데, 폭약을 터뜨렸지만, 한쪽 귀퉁이 조금만 무너뜨렸을 뿐이다. 나중에 모택동의 "최고지시"가 내려와서 그만 두게 되었다. 분묘는 대철문과 전원(前院)간에 간격을 두었다. 이 철문도 다른 것과 다르다. 산(山)자모양의 배열이고, 중간이 크고 양쪽은 적다. 철문의 위에는 훈장과 같은 휘장을 붙였는데, 서양의 방식이다. 원형의 묘는 약 8미터 높이인데, 주위는 청석으로 경계를 삼았다. 묘의 앞에는 석탁이 있는데, 이것은 중국전통모양이다. 종합하면, 원세개의 묘는 전체적으로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오늘 날의 용어로 말한다면 아주 특수한 경우이다. 정치수완을 잘 활용했고, 시대를 역행하던 통치자가 이런 능묘에 누워 있는데, 그가 어찌 편안히 안식을 취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