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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르칵타니(Sorkaktani) : 황제 4명을 낳은 여인

중은우시 2007. 5. 30. 21:46

세상에는 한 여인이 여러명의 황제를 낳은 경우도 드물기는 하지만 있기는 했다. 그러나, 소르칵타니와 같은 경우는 없었다. 그녀는 일생동안 4명의 아들을 낳았으며, 그 중의 세 아들은 몽골, 중국, 페르시아의 황제를 평생 지냈고, 나머지 한 아들은 약간 운이 나빠서 잠시동안 황제를 지내다가 쫓겨났다.

 

출생순서대로 하면, 이 네 명의 아들은 각각 몽케(Munkhe Khan), 쿠빌라이(Khubilai), 훌레구, 아릭부케이다. 몽케는 몽골제국의 칸이었고, 쿠빌라이는 원나라를 개창했고, 훌레구는 일한국(페르시아)의 황제였다. 아릭부케는 일찌기 쿠빌라이와 황제다툼에서 우세를 점한 적이 있고, 몽골제국의 황제를 근 4년간(1260-1264) 하다가 쫓겨났다.

 

이들 네 아들이 이렇게 황제직에 있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징기스칸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던 부친 톨루이(Tolui)가 있었을 뿐아니라, 총명하고 능력있는 모친 소르칵타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르칵타니가 언제 톨루이에게 시집갔는지에 대하여 지금은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그가 톨루이의 처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고, 가장 일찍 톨루이에게 시집갔으며, 가장 총애를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톨루이의 11명의 아들 중에서 그녀의 뱃속에서 낳은 아들은 바로 위의 4명이다.

 

징기스칸의 본처인 보르테는 평생 4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 네 명의 아들중 톨루이는 가장 어린 아들이었다. 몽골의 습속에 따르면, 막내아들이 부친의 유산을 승계했다. 이외에 톨루이 본인이 네형제중 가장 재능이 뛰어났다. 그래서, 징기스칸이 톨루이를 좋아했던 것은 당연하다. 징기스칸은 일찌기 그에게 감국(監國)을 맡기기도 하고, 톨루이를 자기의 '나카르(파트너)'라고 부르기도 했다.

 

징기스칸은 톨루이에게 황제위를 넘겨주려고 했으나, 가족내부분쟁으로 결국 셋째아들인 오고타이에게 물려주고 만다. 이에 대한 보상과 몽골풍습에 따라 징기스칸은 절대다수의 재산을 톨루이에게 나눠준다. 가장 직접적인 대비는 이렇다: 톨루이가 받은 군호는 10만1천호였고, 칸을 승계한 오고타이는 겨우 4천호를 받았다.

 

그러나, 몽골제국시기에는 이러한 규정이 있었다. 비록 전황제의 유언이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부족대회(쿠릴타이)"를 최종통과해야 새황제는 비로소 즉위할 수 있었다. 이것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징기스칸이 1227년 7월 12일에 사망했다. 그가 죽은 후 2년간 몽골제국은 정식으로 새황제를 정하지 못했다. 결국 1229년 8월, 몽골의 여러 왕들과 대신들이 모여서 쿠릴타이대회를 열었다. 회의는 톨루이가 주재했고, 야율초재가 중간에서 조정을 맡았다. 오랜시간동안의 논의를 거쳐, 실력이 뛰어난 톨루이는 부친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칸의 지위를 셋째형인 오고타이에게 넘겨준다.

 

톨루이의 실력이 가장 컸으므로, 그가 자신에게 칸을 넘겨주었지만, 오고타이는 여전히 주저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 동생의 앞에서 칸에 오른다는 것은 스스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양보한다. 여러번의 양보를 거쳐 오고타이는 둘째형 차카타이, 동생 톨루이, 숙부 오티치진이 함게 밀고 끌어 몽골제국의 칸의 보좌에 오른다.

 

오고타이는 황제가 된 후, 톨루이는 약속을 지켜 성심성의껏 그를 보좌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고타이가 마음 속으로 이 실력이 뛰어난 동생을 꺼려했을 것임은 쉽게 알 수 있다.

 

1231년 오고타이와 톨루이가 군대를 이끌고 금나라를 치러간다. 징기스칸이 죽기 전에 이미 몽골대군이 병사를 나누어 금나라와 송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금과 송간에는 '정강지치'라는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송나라는 절대 금나라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몽골제국에 도움을 줄 것이었다. 금나라를 멸망시키면 송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불행한 것은 징기스칸의 전략적인 안목이 다시한번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몽골대군이 밀려오자 금나라 애종은 송나라에 손을 벌린다. 그러나, 송나라 이종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오히려 몽골제국과 연합전선을 구성해서 금나라를 같이 치게 된다.

 

금나라는 좌우협공에 밀려 3년간 버티다가 결국 1234년 멸망한다. 37세의 금애종은 자진한다. 그러나, 몽골제국은 개선하는 도중에 오고타이가 병에 걸려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병세는 급속히 진전되고, 병에 걸린후 1달도 되지 않아 오고타이는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지경에 처한다. 군대를 따라온 샤먼(무당)들도 칸이 죽음의 길로 다가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마지막 결론은 몽골대군이 금나라를 멸망시킬 때, 너무 참혹하였고 이것때문에 금나라 토지의 신들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반드시 보복할 것이므로, 어떤 제사활동도 효력이 없으며, 칸 스스로 죽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아니면 칸의 지위와 비슷한 황족이 죽어야 그들의 분노를 삭힐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때 톨루이가 일어선다. 그는 자기가 바로 그러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부친이 형을 정하여 칸의 지위를 잇게 한 것은 만국을 통솔하라는 지고한 임무를 맡긴 것이다. 나는 칸형을 도와 보좌하여, 잊어버린 일들을 일깨워주고, 잠잘 때는 깨도록 했다. 만일 칸형을 잃는다면, 나는 누구를 깨우고 일깨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대신 죽기를 원한다. 하물며 전쟁에서 가장 많이 죽인 것은 나이다. 이런 죄를 지은 것도 나이므로 나를 데려가고 싶어할 것이다"

 

샤먼은 바로 나무그릇을 가져왔다. 안에는 오고타이의 몸을 문지른 후, 저주를 담은 물이 담겨 있었다. 톨루이가 이 물을 마신후 오고타이는 과연 회복되었고, 톨루이는 40여세의 나이로 죽게 된다. 톨루이의 이러한 형을 대신하여 죽은 '의거'는 전체 몽골제국의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오고타이도 감격해 마지 않게 된다.

 

톨루이의 죽음은 이렇게 신비스럽게 <<몽골비사>>에 적혀 있는데, 이는 원나라 역사상 최대의 미스테리이다. 톨루이가 죽기 직전에 오고타이에게 자기의 처자식을 돌보아달라고 유언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어떻게 돌보더라도 과부는 과부이고 고아는 고아이다. 나중에 발생한 사실들을 보면 오고타이가 그다지 잘 돌보아주지는 않았던 것같다.

 

몽골제국에서 성행한 것은 샤만(무당)교였다. 당시의 샤만교는 여전히 원시종교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무술, 인생, 천의....샤만의 해석에 따라 톨루이의 죽음을 보는 것은 절대다수인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소라칵타니는 특수한 신분이었다. 그녀는 징기스칸의 의부인 왕한의 동생인 자하간부의 딸이다. 왕한의 케레이트부는 징기스칸에게 멸망했다. 자하간부도 피살되었다. 그러나, 소르칵타니는 여전히 케레이트부의 신앙을 견지했다. 그녀가 믿는 것은 샤만교가 아니라, 경교(景敎, 네스토리안교)였다. 즉, 기독교의 일파였다. 샤만의 그러한 해석을 소르칵타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편의 죽음을 듣는 순간부터, 소르칵타니는 민첩하게 이 일에 다른 숨은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종교신앙상의 차이때문만이 아니라, 그녀가 몽골칸국 황족내부의 여러가지 숨은 일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징기스칸은 일찌기 3만의 장정을 보내어 자기의 권위를 위협하던 샤만 와와추를 죽이고 시신을 훼손했다. 그리고는 하늘이 와와추의 생명과 시신을 가져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르칵타니는 이성을 재빨리 회복하고,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으니, 톨루이의 "의거"에 따른 명성을 얻는 것이 칸에 의하여 제거되었다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좋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와 동시에 톨루이 가족의 가장으로서, 소르칵타니는 엄격하게 아들과 부하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오코타이칸에게 조금의 빌미도 주지 않으려고 했다. 특히 자손들간의 싸움은 절대로 막았다.

 

소르칵타니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해서 오고타이의 의심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톨루이가족을 건드렸다. 오고타이는 잘 알고 있었다. 톨루이가족을 이끄는 핵심은 소르칵타니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바로 조서를 내린다. 소르칵타니에게 개가하라고 하며, 자기의 장자인 구유크(Guyuk)에게 시집가라는 것이다.

 

톨루이가 죽었을 때, 구유크는 27살이었다. 소르칵타니의 장남인 몽케보다 몇살 더 많지 않았다. 몽케는 어렸을 때, 오고타이의 양자를 지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양자의 어미를 자기의 아들에게 시집가라고 명령한 것이니, 이는 전혀 배분이 맞지 않는 혼인이었다. 배후에 숨은 진정한 원인은 오코타이가 이 기회에 톨루이가족의 병권과 재산을 오코타이계로 옮기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톨루이가족의 정신적 지주를 없애버리려는 것이었다. (배분을 따지자면 복잡하다. 소르칵타니는 왕한의 조카딸이므로 원래 징기스칸과 배분이 같은데, 그의 아들에게 시집가서 며느리가 되었다. 이제는 다시 오고타이가 자기의 제수인 그녀를 다시 며느리로 삼겠다고 한 것이다)

 

조서를 받은 소르칵타니는 아주 진정하고 완곡하게 답변한다: "저는 감히 칸의 뜻을 거스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저는 이전에 맹서를 한 적이 있는데, 먼저 톨루이의 자녀를 성년이 될 때까지 기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맹서를 어길 수 없습니다"

 

톨루이가 형을 위하여 죽었다는 명성이 있었고, 소르칵타니가 아주 부드럽게 거절하였으므로, 오고타이로서도 트집을 잡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젊은 구유크는 부친의 뜻도 모르고, 소르칵타니를 취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오고타이는 할 수없이 명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구유크와의 혼인은 소르칵타니가 맞부닥친 유일한 골치거리는 아니었다. 오고타이는 아무 이유없이, 그리고 아무런 종실과의 상의도 없이, 홀연 톨루이가족의 3천군호를 자기의 둘째아들인 고단의 아래로 옮겨버린다. 이 도전은 공개적이었다. 과연 톨루이부하장수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정의를 세우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르칵타니는 전혀 가볍게 움직이지 않고 부하들에게 충동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고 했으며, 그들의 분노를 사그라들게 했다. 그녀의 설명을 듣고, 그녀의 아들과 장수들은 인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외에 소르칵타니는 이 손해를 이익으로 바꾸어 놓았다. 자기의 부하와 재산을 다시 돌려받을 수는 없었지만, 이 기회에 고단과 사이를 좋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연 고단은 오고타이계에서 톨루이가족을 가장 지지해주는 인물의 하나가 되었다. 아쉽게도 그는 일찍 죽었고, 톨루이가족에게 더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톨루이가 죽기 전에, 그와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던 큰형 주치는 이미 사망했다. 그리고 주치의 봉국은 머나먼 킵차크한국이었다(돈강, 볼가강일대). 그러나, 소르칵타니는 주치와 남편이 죽고, 킵차크한국이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여, 이들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하지 않았다. 반대로 소르칵타니의 주재하에, 톨루이가족과 주치가족은 아주 긴밀하게 연락했다. 이것도 오고타이가 함부로 톨루이가족에게 손을 뻗을 수 없는 하나의 이유였다.

 

소르칵타니의 관리하에, 톨루이가족은 오랫동안 아주 공손하게 오고타이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간이 흐르자 오고타이도 더 이상 그들을 심하게 경계하지 않았다. 이후 톨루이의 아들들은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고, 갈수록 실력이 강해졌다. 오고타이도 그들을 더 이상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아끼게 되었다. 오고타이는 소르칵타니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으므로,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가능한 한 들어주게 되었다.

 

그러나, 소르칵타니는 여전히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송이종 원년(1241년), 11월 56세인 오고타이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시다가 세상을 떠난다. 그의 여섯째 황후인 내마진탈열가(乃馬眞脫烈哥)가 오고타이의 유언을 바꾸어서,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여, 몽골제국의 칸의 지위가 다시 5년간 비어있게 된다.

 

이 5년간, 무수한 종왕들이 칸을 차지하려고 생각하여 서로 싸우게 되고,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톨루이가족은 비록 실력이 강하지만, 소르칵타니의 주도하에 이 혼전에 끼어들지 않는다.

 

내마진이 권력을 장악한지 4년이 지난 후인 1246년 봄에 몽골칸국은 다시 한번 쿠릴타이대회를 카라코룸에서 열게 된다.오고타이의 생전의 유언으로 셋째아들 고추의 아들인 실열문(失烈門)이 황제위를 승계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여러 왕들이 모두 내마진의 장자인 구유크가 황제위를 승계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주치의 아들인 바투의 불만은 특히 심했다. 그는 아예 회의에 나오지도 않았다. 이런 때, 소르칵타니는 구유크를 지지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톨루이가족은 대회에 가장 먼저 도착한다.

 

구유크가 황제위에 오른 이후, 그는 소르칵타니에게 매우 감사해 한다. 그리하여 톨루이가족에 각종 영예와 권력을 부여한다. 구유크가 은혜를 갚는 와중에도 일찌기 원한이 있던 바투를 잊지는 않는다. 황제가 된 후, 그는 즉시 킾차크한국을 토벌하러 간다.

 

소르칵타니는 이 소식을 금방 들었다. 그는 밀사를 보내어, 구유크가 출병하였다는 소식을 암암리에 바투에게 전한다.  더 말할 것도 없이, 구유크를 자기편으로 만든데 이어, 바투까지도 자기에게 감격해마지 않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양측 모두의 지지를 확보하였으므로 소르칵타니가 이끄는 톨루이가족은 앞으로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여지가 있었다. 이해 4월, 구유크는 바투토벌군을 이끌고 막 우룬구강에 도착했을 때, 돌연 사망한다. 그의 사인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지만 거의 모두 바투와 관련이 있다. 심지어 어떤 견해에 의하면, 일찌감치 소식을 들은 바투가 사람을 보내어 구유크를 독살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소르칵타니의 정보제공과 관계가 없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3년간 칸을 지내던 구유크가 이렇게 죽었다. 소르칵타니는 아주 주도면밀했다. 첫번째로 사람을 모내어 대황후를 찾아뵙는다. 대황후는 임시로 권력을 장악한다. 아쉬운 것은 그녀에게는 소르칵타니와 같은 두뇌가 없었고, 아들들을 다루는 재주가 없었다. 이로써 몽골제국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런 순간에 바투는 종실에 초청장을 띄운다. 자신의 킾차크한국에서 새로운 칸을 선출하는 대회를 개최하겠다는 것이다. 바투는 징기스칸의 장손이므로, 대황후를 비롯한 사람들이 그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참석하지 않더라도 대표를 파견하게 된다.

 

바투는 스스로 칸에 오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러나, 국면을 살펴본 후에 톨루이가족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적극적으로 톨루이의 장남인 몽케를 새 칸으로 옹립하자고 주장하게 된다. 몽케가 새 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행운스럽게도 총명한 모친인 소르칵타니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르칵타니는 바투가 새 칸을 뽑는 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몽케를 보낸다. 다른 종실들처럼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 태도는 바투가 몽케를 새로 생각하게 되는 결과를 갖게 되고, 그는 몽케가 자신을 무시하지 않는 칸이 될 것으로 믿게 된다.

 

바투의 극력 지지하에, 몽케는 주치가족(징기스칸 장남)과 톨루이가족(징기스칸 사남)의 공동추천으로 새로운 칸에 오른다. 이 소식은 금방 차카타이가족(징기스칸 이남)과 오고타이가족(징기스칸 삼남)의 반대에 부닥친다. 그러나, 이때의 소르칵타니와 몽케는 이미 주도권을 장악했었다. 그들에게 연속 2년간 초청장을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한 후에, 몽케는 스스로 쿠릴라이대회를 소집한다.

 

1251년 여름, 몽케는 정식으로 카라코룸에서 칸에 오른다. 동시에 부친 톨루이를 영무황제로 추존하고, 예종(睿宗)으로 한다.

 

몽케가 칸이 된 것은 오고타이가족의 강렬한 불만을 사게 된다. 그들은 처음에 맹서한대로 칸의 지위는 영원히 오코타이가문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톨루이가문이 칸의 자리를 빼앗아 간 것이 아닌가. 그래서 구유크의 아들인 나후는 오고타이의 다른 두 손자인 쿠두헤이, 실렬문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소식이 중도에 누설되었고, 몽케는 이 기회에 차카타이계와 오고타이계의 자신을 반대한 모든 사람을 붙잡아 버린다. 그리고 재판을 거쳐 모두 죽여버린다.

 

그중 가장 주의를 끄는 재판은 바로 소르칵타니의 금장(金帳)안에서 진행되었다. 재판받는 사람은 원정종 구유크의 대황후와 실렬문의 모친인 다하치하툰이었다. 이때 몽케와 소르칵타니는 이전처럼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지내던 모습이 아니었다. 대황후와 다하치하툰이 두 명은 금방 매를 이기지 못하고 실토하게 되었으며, 사형을 선고받는다.

 

오고타이가족은 이로써 뿔뿔이 흩어진다. 나이가 어리거나 톨루이가족과 가까운 오고타이의 후손들이 오코타이가족의 옛 땅을 나누어 갖게 되어, 몽케에게 위협이 될만하지 않았다.

 

톨루이가 죽은 후 17년이 지나서 소르칵타니는 전체가족의 이익을 보호하고, 조용히 가족의 세력을 키웠으며 결국 몽골제국의 권력을 장악한다.

 

만일 소르칵타니의 모든 행동이 톨루이의 복수를 위한 것이었다면 아마도 과장된 것이리라. 사서에 기재가 없을 뿐아니라, 몽골제국 사람들의 생각은 한족, 금나라, 서하사람들과는 많이 달랐다.

 

그러나 어쨌든간에, 소르칵타니는 그녀의 총명한 두뇌와 정치적인 처세를 통해서 역사상 가장 우회적인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한다. 그녀는 원나라역사상 아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녀의 영향은 징기스칸의 모친인 하얼룬에 다음가는 정도이다.

 

아들이 제국의 황제가 되고, 남편이 황제로 추존된 다음 해에 소르칵타니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나이는 60세 전후였을 것이고, 몽고관습에 따라 기련곡에 묻힌다.

 

소르칵타니에 대하여 역사서에 선명한 기록이 남게 된 것은 그녀의 셋째아들 훌레구에 의해서이다. 그는 몽고의 제3차원정의 최고사령관이었고, 메카와 다마스커스를 짓밟는다. 훌레구는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가 가는 곳은 인간지옥이었다. 그러나, 모친 소르칵타니가 기독교를 믿었으므로, 각지의 기독교도들은 다 살려주었다.

 

소르칵타니의 장남인 몽케는 9년간 황제로 있다가 7월에 남송을 치는 군영에서 사망한다. 위치는 사천성의 조어산이다.

 

몽케가 죽은 후, 동생인 쿠빌라이는 중원에서, 훌레구는 이란에서, 제국의 수도를 지키던 막내 아릭부케는 카라코룸에서 각각 황제의 보좌에 오른다.

 

1260년 3월, 소르칵타니의 둘째아들 쿠빌라이가 개평에서 칸에 오른다.

1260년 4월, 소르칵타니의 막내아들 아릭부케가 안탄하에서 칸에 오른다.

1264년, 4년의 황제쟁탈전을 거쳐, 쿠빌라이가 최종승리하고, 아릭부케는 연금되었다가 죽는다.

1265년, 쿠빌라이는 생모 소르칵타니에게 "장성황후"라는 시호를 준다.

1271년, 쿠빌라이는 국호를 "원"으로 고치고 원나라를 세운다. 수도를 대도(북경)으로 정하고, 식민제국시대에서 중원봉건왕조시대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1309년 12월, 원성종 테무르는 조모인 소르칵타니에게 "현의장성황후"라는 시호를 준다.

 

이 여러 영향력있는 아들을 두었으므로, 톨루이와 소르칵타니의 사후의 영예는 아주 높았다. 지금까지도 징기스칸릉의 동전(東殿)에는 그들의 영구가 모셔져 있다.

 

몽고인의 마음 속에 소르칵타니는 신성한 황후, 태후일 뿐아니라, 민간에서는 그녀를 송자낭낭(送子娘娘, 아들을 보내주는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