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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야성(姚冶誠): 장개석(蔣介石)의 두번째 부인 : 노황설사(老黃說史)​장개석이 전후로 4명의 부인을 취했다는 것은 이미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만 두번째 부인 요야성(姚冶誠)의 평생행적에 대하여는 아는 사람들이 드물다.​소주(蘇州) 부근에 야장경(冶長涇)이라는 하천이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야장경 부근은 미녀들이 많이 나오는 곳이라고 한다. 일찌기 이런 말이 유행했다: "고소(姑蘇, 소주를 가리킴)에 미녀가 많다는 것은 허명이다. 진정한 미녀는 야장경에서 나온다."​당시 권세있는 고관들은 앞다투어 야장경 일대의 여자를 처첩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 장개석의 두번째 부인 요야성, 두월생(杜月笙)의 첩 장아매(張阿妹), 왕정위의 3방면군사령관 공국량(龔國良)의 처 왕매매(王妹妹)등이 모두 야장경사람이다.​요야성의 원래 이름은 요이금(.. 2024. 10. 23.
역사가정제(嘉靖帝) 주후총(朱厚㷓): 치신천재(治臣天才), 치국용재(治國庸才) 글: 최애역사(最愛歷史)​정덕15년(1520년) 구월, 남하하여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를 붙잡은 명무종(明武宗) 주후조(朱厚照)가 병이 든다.​반란을 평정하고 귀환하는 도중 명무종은 혼자서 청강포(淸江浦)에서 배를 몰아 물고기를 잡았다. 그러던 중 부주의하여 물에 빠진다. 어려서부터 북경 자금성에서 생활했던 황제가 수영을 배웠을 리 없다. 물에 빠진 그는 병석에 눕는다.​이치대로라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놀기 좋아하는 황제는 이런 저런 사고를 모두 겪었고, 물에 한번 빠져보아야 한 이틀 정도 기침을 하고, 태의들이 지어준 영단묘약을 먹고, 침대에 이틀 정도 누워 있으면 대체로 회복되곤 했었다.​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부대가 북경으로 귀환한 후에도 명무종의 병은 여전히 좋아지지 않았다. 다음 해 정.. 2024. 10. 22.
시진핑의 퇴위와 후계자문제 글: 장준화(張俊華)​최근 중국 경외의 일부 관찰가들은 마치 시진핑의 앞날에 대하여 점쳐보는 붐이 일어난 것같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시진핑은 군권을 이미 박탈당했다고까지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많은 소위 사실은 실제로 대부분 견강부회적인 추측일 뿐이다. 다만, 시진핑의 퇴위와 후계자문제는 확실히 검토해볼 가치가 있다.​중공이 하루라도 존재하는 한 당의 지도자 시진핑의 운명과 그의 후계자에 대해 점치는 것도 좋고, 객관적인 분석도 좋지만 어쨌든 먼추지 않을 것이다. 중공은 후계자와 관련한 이 위기성명제는 영원히 중국정치를 연구하는 중요주제일 것이다. 시진핑에 있어서, 그는 등소평의 10년집정제와 격대지정제도를 타파했다. 그리하여 원래 순조로웠던 일이 더욱 오리무중이 되어버렸다.​중국인의 함 사람.. 2024. 10. 22.
이유(李儒): 삼국시대 최정상급 모사(謀士) 글: 월락성침(月落星沉)​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이유(李儒)라는 이름은 그다지 익숙치 않을 것이다. 유일하게 그를 기억하는 것은 아마도 그가 동탁(董卓)을 대신하여 여포(呂布)를 설득하는 장면일 것이다. 적토마(赤兎馬)로 여포의 마음을 얻어 동탁진영으로 끌어들인다. 나머지 장면에서 이유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주변으로 밀려났다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정사에서 이유는 기실 대단한 인물이다. 그는 동탁의 곁에서 여러번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했고, 동탁을 위해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런 말도 한다. 그와 동탁의 관계는 제갈량과 유비에 비견할 수 있다고. 동탁이 여포에게 죽임을 당한 후, 에는 이유가 왕윤(王允)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느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이유는 그.. 2024. 10. 22.
황건적(黃巾賊) 3명 우두머리의 최후는...? 글: 정회역사(情懷歷史)​황건적의 난은 동한말기의 농민전쟁이다. 한영제 광화7년(184년)에 시작되었으며, 당시 조정은 부패하고, 환관 외척은 권력투쟁이 끊이지 않으며, 변방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고, 국세는 날로 약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전국은 큰 가뭄으로 수확이 거의 없는데도 세금은 줄여주지 않았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가난한 농민들은 거록(巨鹿)사람 장각(張角)의 호소하에 속속 반기를 들고 모여들었다. 모두 알다시피, 황건적의 난은 직접 동한왕조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3명의 우두머리들은 결국 어떤 최후를 맞았을까?​장각(張角)​장각(? - 184), 기주(冀州) 거록(지금의 하북 평향 서남) 사람이다. 동한말기, 장각은 제자들에게 법술(法術)과 주어(咒.. 2024. 10. 22.
이궐전투(伊闕之戰): 전국시대의 분수령, 전신(戰神) 백기(白起)의 등장. 글: 서북낭(西北狼)​기원전293년, 진(秦), 한(韓), 위(魏) 3국간에 분수령적 의미가 있는 전투가 발생한다. 바로 이궐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백기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며 24만의 한,위 연합군을 섬멸한다. 한, 위 양국은 이후 도마위에 놓은 고기처럼 진나라에 유린당한다. 이 전투를 복기해보기로 한다.​이궐전투전의 국제형세​기원전307년, 진무왕(秦武王)이 무거운 것을 들다가 죽은 후, 진나라 국왕의 자리는 그의 동부이모의 친동생 진소양왕(秦昭襄王) 영직(嬴稷)의 머리 위에 떨어진다.​진소양왕의 즉위초기, 진나라는 상앙변법이래 국운이 쇠락한 시기였다. 영직이 즉위한 초기, 국내의 여러 공자들은 그에게 불복했고, 3년에 걸친 계군(季君)의 난이 발생한다. ​반란을 평정한 .. 2024. 10.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