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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120

방통(龐統)은 동오(東吳)의 간첩이었을까? 글: 섭시문사판(攝詩文史版) 음모론자들이 보기에 방통이 유비에 귀순한 것은 동오의 사명을 띈 것이라고 한다. 맥락은 대체로 이러하다: "공조(功曹)는 중요한 직무이다. 주유의 공조인 방통을 동오사람들은 왜 스스로 쓰지 않고, 노숙으로 하여금 유비에게 추천하게 했을까? 서천(西川, 사천)을 취하는 것은 제갈량이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실행시에 유비는 망설였고, 제갈량도 아무런 입장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방통은 계속하여 유비에게 자신을 데리고 사천에 들어가자고 권유했을까? 익주로 들어간 후, 유비는 왜 방통의 건의를 거의 듣지 않았을까? 방통은 적진으로 돌진하는 무장도 아닌데, 왜 군진의 앞에 섰다가 죽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방통이 유비에게 귀순한 것은 정말 동오인들의 계획인 것일까? 혹은 방통.. 2021. 4. 20.
원소(袁紹)의 두 아들은 왜 협력하지 않고 서로 싸웠을까?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원소가 비록 관도전투에서 조조에게 패배했지만, 그래도 하북(河北)의 땅은 여전히 그가 장악하고 있었고, 실력은 여전히 강대했다. 만일 하북의 땅을 원소의 한 아들에게 물려주었다면, 조조가 하북의 땅을 차지하는데 아마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소가 죽자, 그의 두 아들 원담(袁譚)과 원상(袁尙)은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두 형제는 왜 서로 협력하여 공동으로 적을 막아내지 않았을까? 원소의 아들들 중에서, 원소의 자리를 승계할 후보자는 두 명이었다. 즉 원담과 원상이다. 원담이 형이고 원상이 동생이지만, 원상은 인물이 잘 생겼다. 원소의 처인 유씨(劉氏)는 원상을 아꼈고 자주 원소의 앞에서 작은 아들 원상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칭찬한다. 원소도 이 작은 아들이.. 2021. 4. 15.
마초(馬超): 유비에게 온 이후 활약하지 못한 이유는...?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은창종횡지(銀槍縱橫志), 북망진루천(北望盡淚泉) 광위안(廣元)에서 수십년간 살다보니, 이곳의 산수는 아주 친근하게 여겨진다. 광위안은 관광자원도 풍부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삼국문화이다. 광위안은 양평관(陽平關)과 검문관(劍門關)의 사이에 위치한다. 그 가운데 있는 소화고성(昭化古城)은 삼국시대때 가맹관(葭萌關)이라 불렸다. 이곳은 나관중이 에서 멋진 장면을 쓴 곳이기도 하다. 즉 장비가 마초와 싸운 곳이다. 그래서 광위안의 사람들은 마초에 대하여 얘기하기를 즐긴다. 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인물이다. 비록 이 장면은 나관중이 창작한 것이지만. 의 정수는 전반부이다. 마초도 그 정수중의 하나이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은 돌연 나타나서는, 일단 유비에게 의탁한 이후 전혀 활.. 2021. 2. 15.
동오(東吳)의 승상(丞相) 12명은 각각 누구인가?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승상은 백관의 우두머리이고, 고대역사상 아주 중요한 관직이다. 최초의 승상은 사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무왕(秦武王) 2년(기원전309년)이다. 에 따르면, "진무왕2년, 처음 승상을 설치하고, 저리질(樗里疾), 감무(甘茂)를 좌우승상으로 삼았다." 진왕조가 건립된 후, 승상, 태위(太尉),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삼공(三公)이라 불렀다. 한애제(漢哀帝) 원수2년(기원전1년) 승상을 대사도(大司徒)로 명칭을 고친다. 서한의 한애제때부터 동한 한헌제 건안13년(208년)까지 이백여년간은 승상을 두지 않았다. 동한 말기, 조조가 승상직을 회복시킨다. 그러나, 조비가 황위를 찬탈한 후, 조위는 실제로 승상의 직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촉한은 제갈량이 사망한 이후 승상직을 .. 2020. 11. 23.
초선(貂蟬)의 아들이 선비(鮮卑)의 10만철기를 대파했다? 글: 문재봉(文裁縫) 먼저 얘기할 것은 "초선(貂蟬)"이 원래 인명(人名)이 아니라, 한나라때 시종관원(侍從官員)이 쓰는 관모(官帽)의 장식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검으면서 얇고, 얇으면서 가볍고, 가벼우면서 뚤려 있어 아주 아름다웠다. 후궁에 모자를 관리하는 관직을 별도로 설치했는데, 사람들은 '초선'이라는 말로 이런 모자를 관리하는 여관(女官)을 지칭했다. 나중에는 미녀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어 쓰이게 된다. 다음으로, 에는 초선에 관한 여하한 기록도 없다. 가장 먼저 초선이라는 인물이 나타난 것은 라는 책이다. 책에 따르면 초선의 성은 임(任)이고, 원래 여포(呂布)의 처였다. 임도(臨洮)의 전란중에 여포와 헤어져서 나중에 왕윤(王允)의 집으로 흘러들어간다. 초선이 향을 사르고 달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2020. 11. 21.
주유(周瑜)는 적벽대전때 동오(東吳)의 대도독(大都督)이 아니었다?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주유는 적벽대전을 주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래서 후인들은 '삼국주랑적벽(三國朱郞赤壁)'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다만 손권은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양로(兩路)의 부대를 파견했고, 각각 주유와 정보(程普)이고, 좌우독(左右督)으로 임명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적벽대전은 주유가 독립적으로 지휘한 것이 아니고, 주유는 대도독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사실의 진상은 그렇다면 어떠했을까? 대도독이라는 관직이 정식으로 나타난 것은 황무원년(黃武元年)이다. 유비가 촉한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정벌하러 오자, 손권(孫權)이 육손(陸遜)을 대도독으로 임명하여 유비를 막게 한 것이다. 그가 지휘하는 수하의 장수들은 경력이 더 많고, 공로도 큰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주연(朱然), 반장(潘璋)등이.. 2020. 10. 22.
유비가 서촉으로 들어갈 때, 유장(劉璋)을 배신하고 유비에게 온 3명의 최후는...?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익주(益州)전투는 동한말기, 유비가 익주를 빼앗기 위하여 유장과 벌인 전쟁이다. 적벽대전이후, 유비는 형주를 차지했다. 제갈량의 에 나오는 형주, 익주를 차지하는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유비는 일찌감치 익주로 진격하는 것을 도모했다. 이때 유장은 한중의 장로에게 제약을 받고 있었고, 다시 강대한 조조가 한중을 취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는 촉에 위협이 되었다. 장송(張松)은 그리하여 유장에게 유비를 불러들여 실력을 강화시키자고 건의하게 된다. 장송등의 권유로 유장은 유비를 촉으로 불러들인다. 211년, 유비는 촉에 들어간 후 처음에는 유장과 관계를 좋게 유지했다. 그러자 유장은 유비에게 병사를 내주며 그에게 장로를 치도록 한다. 다만, 유비는 가맹(葭萌) 일대까지 진군한 .. 2020. 10. 14.
원소(袁紹)는 어떻게 기주(冀州)를 차지했는가? 글: 천추원(千秋遠) 삼국시대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런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원소는 수수께끼같다. 그가 관도지전 이후에 보인 모습을 보면 그다지 우수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기주, 청주, 유주, 병주의 4개주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 당시 전체 천하는 겨우 11개주인데, 그중 4개주를 차지하다니, 그 시대의 최강자가 아니었던가. 그중의 기주는 원소가 성공한 기반이 되었다. 그렇다면 원소는 어떻게 기주를 얻었을까? 이건 기주목(冀州牧) 한복(韓馥)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1. 아무 생각이 없는 행운아 한복 기주라는 곳은 백성도 많고 물산도 풍부한 좋은 지방이다. '천하지중자(天下之重資)'라고 불렸다. 기주목은 자연히 좋은 관직이었다. 기주목 한복은 원래 어사중승이고, 기주는 그와 관계가 없었.. 2020. 10. 13.
주유(周瑜): 그를 폄훼한 것은 나관중이 아니다. 글: 채휘(蔡輝) "주유는 분노가 가슴에 가득 찼고, 말에서 떨어진다. 좌우는 급히 그를 구해서 배로 돌아온다. 그때 병사가 와서 전하기를 현덕, 공명이 산꼭대기에서 술을 마시면서 음악을 즐기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주유는) 장탄식을 하고, 좌우에게 붓과 종이를 가져오게 하여 오후(吳侯)에게 글을 쓴다. 그리고 여러 장수를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진충보국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나에게 준 명이 다했다. 그대들은 오후를 잘 모셔서 대업을 함께 이루도록 하라!" 말을 마치고 혼절한다. 그리고 서서히 깨어나더니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을 하며 말한다: "어찌 나 주유를 낳고, 다시 제갈량을 낳으셨습니까' 몇번 소리를 지르고는 사망한다. 나이 36세이다." 제36회 에 이 묘사는 너무나 생생하다.. 2020. 9. 27.
삼국시대에 동오(東吳)에서 소년영웅이 많이 배출된 이유는...? 글: 취간역사(趣看歷史) 난세에 호걸이 많이 나온다. 삼국시대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기에는 명장이 많이 배출되었을 뿐아니라, 나이가 젊을 때부터 군대에 들어가서 지휘를 한 소년영웅들도 많이 배출된다. 그런데, 위, 오, 촉 삼국중에서 어린 나이에 명성을 얻은 명상이 가장 많은 나라는 조위도 아니고, 촉한도 아니며, 동오였다. '강동다영호(江東多英豪)'라는 말이 전혀 지나치지 않다. 그렇다면 왜 소년영웅이 강동에서 많이 배출되었을까? 거기에는 대체로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모범'의 역량이다. 강동의 기업은 손책(孫策)이 혼자 힘으로 일궈낸 것이다. 195년 손책은 원술(袁術)에게서 벗어나 장강을 건너 강동을 평정하는 전투를 시작한다. 몇년만에 일거에 강동육군(江東六郡)을 평정한다. 그러나 200년.. 2020. 9.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