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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116

명인종(明仁宗)의 제왕술(帝王術) 글: 호연문사(浩然文史) 홍희(洪熙, 명인종 주고치의 연호)떄, 명인종(明仁宗) 주고치(朱高熾)는 몸이 좋지 않았고, 당시 조정을 질타하던 5명의 거두 건의(蹇義), 양사기(楊士奇), 양영(楊榮), 김유자(金幼孜), 하원길(夏元吉)이 핵심의사결정층이 되어 송인종을 보좌한다. 영락(永樂, 명성조 주체의 연호)때, 명나라는 실제로 의사결정권이 3분되어 있는 상태였다. 인종에 이르러, 과거 자신을 따랐던 노신들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 건의, 양사기에게 은장(銀章)을 새겨서 준다. 이 은장은 두 노대신의 공로가 혁혁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이 은장을 찍어 올리는 상소는 직접 황제에게 전달되도록 했다. 나중에 양사기가 극력 주장하여, 명인종은 양영, 김유자, 하원길의 3명에게도 은장을 수여한다. 이것은 .. 2022. 7. 20.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의 형제들은 어떤 최후를 맞이했을까? 글: 흔다적노력(很多的努力) 주체(朱棣, 나중의 명성조 영락제)는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의 4남이다. 주표(朱標)는 주원장은 장남이다. 홍무원년, 주표는 황태자에 오른다. 즉 제국의 합법적인 후계자이다. 주원장은 관리들을 극단적으로 불신해쏙, 많은 개국공신을 죽여버렸다. 그러나, 주원장은 황태자 주표에 대한 교육을 아주 중시하여, 송렴(宋濂), 이선장(李善長), 서달(徐達), 유기(劉基)등은 모두 주표를 가르친 바 있다. 주원장과 달리, 주표는 온문이아(溫文爾雅)했으며, 일처리는 온화했다. 여러번에 걸쳐 주원장에게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지 말 것을 권했다. 만일 그가 순조롭게 황위를 이어받았다면 아마도 인후한 군주가 되었을 것이다. 주원장의 생각은 일장일이(一張一弛)였다. 그가 지배하는 국가는 .. 2022. 6. 24.
조휘(趙輝): 중국역사상 가장 장수한 부마, 명나라 9조(朝)의 황제를 겪다 글: 도도설문사(濤濤說文史) 최근 몇 년간 전통적인 한문화를 젊은이들이 갈수록 더 좋아하고 있다. 원래 TV를 수십년동안 차지하고 있던 청나라궁중드라마가 많이 줄어들었고, 명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드라마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최근 비교적 인기리에 방영된 그리고 이전의 그리고 오랫동안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던 . 봉건왕조중 가장 마지막 한족통치의 왕조로서, 명나라는 독보적인 매력이 있다. 명나라는 끝까지 화친하지도 않고, 투항하지도 않으면서 천자가 국문을 지켰던 왕조이다. 대명은 후세에 많은 보물을 남겼다. 예를 들어 4대명저, 본초강복, 그리고 수많은 문인, 장수. 예를 들어 왕양명, 탕현조, 서하객, 이시진등등. 그외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전설적인 인물도 있다. 예를 들어 9명의 황제를 .. 2022. 6. 7.
가정제(嘉靖帝): "제왕술(帝王術)"의 최고고수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정덕15년(1520년) 구월, 남하하여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를 생포한 황제인 명무종(明武宗) 주후조(朱厚照)가 병석에 눕는다. 원인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도중에 혼자서 강위에서 배를 띄우고 물고기를 잡다가 부주의하여 물에 빠졌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북경 자금성 안에서만 살아왔던 황제는 수영을 할 줄도 몰랐고, 물에 빠져서 익사할 뻔한다. 이치대로라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온갖 놀이를 다해 본 황제라면 무수한 일을 겪었을 것이고, 물에 한번 빠졌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이틀 정도 기침이나 하고, 태의가 지어준 약이나 먹으면서 침상에 한 이틀 정도 누워있으면 정상으로 회복될 일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대부대가 경성으로 돌아온 후에도 명무종의 병은 낫지를 않.. 2021. 4. 23.
엄숭(嚴嵩)은 어떻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내각수보(內閣首輔)에 올랐을까?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엄숭은 자가 유중(惟中), 호는 개계(介溪)이며, 강서 분의(分宜, 지금의 강서성 신여시 본의현)사람이다. 엄숭의 부친은 오랫동안 과거시험을 쳤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미련이 컸으므로 모든 희망을 아들에게 걸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들을 세심하게 가르치고 길렀다. 엄숭은 5살때 엄씨사(嚴氏祠)에서 글을 배웠고, 9살때 현학(縣學)에 들어간다. 10세때 현시(縣試)를 통과하며, 19세때 거인(擧人)이 되고, 25세때 마침내 엄숭은 부친의 염원을 이룬다. 홍치18년(1505년), 엄숭은 을축과(乙丑科)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서길사(庶吉士)로 뽑힌다. 나중에는 편수(編修)의 관직을 받았다. 나중에 엄숭은 큰 병이 들어, 할 수 없이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2020. 7. 2.
가정제(嘉政帝)는 왜 엄숭(嚴嵩)을 중용했을까?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명세종(明世宗) 가정제는 논쟁이 많은 황제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영명하여 명태조 주원장에 비견할 만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혼용무능(昏庸無能)하여 연단(煉丹)에만 빠져있었다고 본다. 다만, 부인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명세종은 즉위초기의 몇년간 확실히 잘 통치했었다는 것을 설사 후기에는 일년내내 수도에 빠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조정을 완전히 내팽개쳐둔 것은 아니었다. 명세종은 지극히 총명하고 자신감이 넘치던 황제이다. 그리고 약간은 과대망상이 있었다. 자신과 얘기할 자격이 있는 것은 엄숭과 같은 관료사회의 노련한 인물들만이라고 여긴다. 결국 명세종은 무능한 혼군이 아니었다. 엄숭(嚴嵩)을 살펴보자. 엄숭은 명나라때 강서(江西) 분의(分宜) 사람이다. 자는 유중(惟中).. 2020. 6. 30.
이성동(李成棟): "항명(降明) - 항청(降淸) - 재항명(再降明)", 두 황제를 죽이고, 가정삼도(嘉定三屠)를 일으킨 도살자 글: 만풍모우(晩風暮雨) 명나라말기, 한 무리의 충신양장(忠臣良將)이 배출된다: 예를 들어 사가법(史可法), 소관생(蘇觀生), 이정국(李定國), 정성공(鄭成功), 진방언(陳邦彦), 왕흥(王興)등이 있다. 동시에 한 무리의 난신적자(亂臣賊子)도 배출된다. 예를 들어, 이영방(李永芳), 퉁양성(佟養性), 오삼계(吳三桂), 전겸익(錢謙益), 공유덕(孔有德)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이 양자의 중간에 있다. 그들은 '이익'을 쫓았다. 하는 행위는 모두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명나라에 공도 있고 과도 있어, 간단하게 충신, 간신으로 나누어 평가하기 어렵다. 그 중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성동이다. 1. 귀순명조(歸順明朝) 이성동은 자가 정정(廷楨)이고, 호는 호자(虎子)이.. 2020. 6. 3.
정덕제(正德帝) 재위16년간의 황당한 사건들... 글: 만풍모우(晩風暮雨) 명무종(明武宗) 주후조(朱厚照)의 일생은 "황희무도(荒嬉無度), 자의황위(恣意枉爲)"라는 여덟자로 개괄할 수 있다. 그는 재위16년간 "격구주마(擊毬走馬), 방응축견(放鷹逐犬), 배우잡극(俳優雜劇), 착진어전(錯陳於前)"했고, "여외인교역(與外人交易), 압닐설설(狎昵媟褻)", "일유부족(日遊不足), 야이계지(夜以繼之)"하면서 무수한 황당한 일을 벌였다. 여기에서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1. 호랑이와의 결투 무종은 즉위한지 1년후, 서화문(西華門) 밖에 개인적인 행궁을 건립했고, 무수한 진금맹수(珍禽猛獸)를 길렀다. 거기에는 표범(豹子)가 있어서, "표방(豹房)"이라고 불렀다. "표방"에는 호랑이도 있었다. 사료에 따르면, 무종은 최소한 호랑이와 2번 결투를 벌였다. 제1차는 무.. 2020. 5. 7.
명나라말기의 황제들은 무능했지만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글: 문재봉(文裁縫) 북경대학 교수인 양쿠이송(楊奎松)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는 얼마나 죽기를 두려워했는가"라는 글을 쓴 바 있다. 확실히 부의(溥儀)는 무척이나 죽는 것을 겁냈다. 만주국시기 부의는 죽음을 겁내서 매번 일본 관동군의 고위참모 요시오카 야스나오(吉岡安直).. 2020. 3. 3.
명초풍운(明初風雲): 유백온(劉伯溫) vs 이선장(李善長)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유백온은 명나라초기의 개국공신이며, 한때 주원장에게 중용되었다; 이선장도 주원장의 믿을만한 신하로 주원장으로부터 중용되었다. 이 두명의 문신이 대결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립한 후, 중앙행정기관은 원나라의 중서성(中書省)을 .. 2020. 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