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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중남해 정권교체의 8대증거 (2)

by 중은우시 2025. 6. 7.

글: 뇌가(雷歌)

5. 폐태자 후춘화(胡春華)가 권토중래하고, 공청단파인물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다.

후춘화는 원래 후진타오가 격대지정한 후계자이다. 2017년 19대때 정치국상위가 되고, 2022년 20대때 원래 총서기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시진핑은 권력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종신황제가 되고 싶었다. 헌법수정이전인 2017년에 먼저 쑨정차이를 제거한다. 후춘화도 제거하고자 했고,내몽골에서 20년을 역으로 조사했지만, 무슨 거리를 찾아내지 못한 것같다. 그래서 그를 진성감옥에 넣지 못했다. 그러나 20대때 정치국상위에 오르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국에서 쫓겨난다. 정협으로 가서 치욕적인 부주석이 된다. 이걸로 그를 처리한 셈이 된다. 이때부터 후춘화에게는 "폐태자"라는 이름이 붙는다. "폐태자"에 대하여 죽이지 않은 것만도 은혜이니, 다른 생각은 품을 수도 없었따.

다만, 금년 양회이후, 상황은 크게 변화한다.

4월 중순, 시진핑이 동남아 3국을 순방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후춘화는 서아프리카 3개국을 순방한다. 시간은 1주일에 달했다.

5월 25일, 후춘화는 돌연 베트남 주중대사관으로 간다. 신화사에 따르면, "중국측을 대표하여" 서거한 베트남의 전국가주석 쩐 덕 르엉(陳德良)을 조문한다. 베트남은 "동지 및 형제"인 중요국가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관세전의 협력건도 있어. 시진핑이 지난달 막 방문한 적도 있다. 격을 따지자면, 조문하러 가는 사람은 최소한 정치국위원이상의 부국급 지도자여야 했다. 시진핑이 왜 후춘화라는 폐태자를 그의 대표로 나서게 했을까?

이런 통상적이지 않은 점에 대해 여론은 "폐태자부활"의 중요증거라고 본다. 만일 시진핑이 이미 실세했으면, 공청단파가 이미 권력핵심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각도에서 보면 후춘화가 등장할 때는 격이 높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은 또한 후춘화가 부활했따는 것을 말해주고, 권력중심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와 동시에 또 다른 정협부주석 션웨웨(沈躍躍)도 매우 활발하다. 4월 29일, 그녀는 광시(廣西) 팡청강(防城港)으로 가서 2025년 국제의학혁신협력포럼의 개막식에 참석하여 주제강연을 한다. 5월 21일, 션웨웨는 다시 시안에 나타나서, 제9회 비단길국제박람회 개막식에 참석하고 주제강연을 한다. 션웨웨는 오랫동안 조용히 지내오던 공청단파의 골간이다. 정협에서 시간을 때운지 오래 되었는데, 최근 들어 속속 주빈의 신분으로 각종 활동에 참석하여 여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5월 27일, 중국소선대(少先隊, 소년선봉대) 제9기 전국대표대회가 북경에서 개막한다. 금년에 회의에서 시진핑의 축하서신을 대독한 사람은 새로 취임한 중앙조직부장 스타이펑이다. 그도 공청단파 인물이다(5년전 제8기에 축하서신을 대독한 사람은 국무원 부총리 쑨춘란이었다).

여러가지 조짐을 보면, 최근 중공고위층의 권력변동에서 후진타오, 원자바오를 대표로 하는 공청단파가 이미 권력중심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선전문구가 크게 바뀌었다. "양개확립", "양개유호"등 시핵심을 옹호하는 구호는 최근 들어 관영매체에서 기본적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집체영도"를 제창하고, 개인숭배를 반대하는 글이 계속 나타난다.

만일 최근 반년여동안 관영매체의 선전문구를 주목해보았다면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대의 변화는 바로 이전에 화면을 가득채우던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같은 류의 표현이 아주 적어졌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각급관리들이 연설을 할 때면 반드시 입에 "양개확립" "양개유호"를 달고 있었는데, 지금은 관리들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시핵심"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최근 1년간 관영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집체영도(集體領導)", "민주집중제", "개인숭배반대", "일언당반대"의 글이다. 이 방면에서 <해방군보>가 가장 두드러진다. 작년 12월을 전후하여 연이어 5편의 평론을 시리즈로 발표했는데, 요 몇년간 두드러지게 강조하던 "군사위주석책임제", "시핵심옹호"등등은 보이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기치가 선명하게 군내의 '집체영도'을 강조하고, '일언당'에 반대한다고 말한다. 아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을 겨냥하는지 알 것이다.

7. 차이치(蔡奇)등 시진핑파의 핵심골간이 배를 바꿔탄 조짐이 나타난다.

시진핑의 심복중에서 가장 가까운 인물은 차이치이다. 시진핑이 가장 중용하고 의존하는 사람이 바로 차이치이다.

정치국 상위중에서 차이치는 서열이 비록 5위에 불과하지만, 그는 중앙서기처의 제1서기와 중앙판공청주임이라는 양대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며, 당건(黨建), 조직(組織), 선전(宣傳)과 이데올로기(義識形態)를 관장한다. 또한 중남해의 대내총관으로 그의 발언권은 그보다 서열이 앞서는 총리 리창(李强), 전인대상무위원장 자오러지(趙樂際)와 정협주석 왕후닝(王滬寧)을 훨씬 넘어선다. 그는 중남해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2인자라 할 수 있다.

다만 최근의 일부 조짐을 보면, 차이치의 말이나 행동이 달라졌다.

중남해의 대내총관, 시진핑의 가장 가까운 심복으로서 시진핑이 가는 곳이면 차이치가 항상 함께 갔다. 다만 5월 19일, 20일 시진핑이 허난 뤄양등지를 고찰할 때, 항상 그의 곁에 있던 중앙판공청 주임 차이치와 중앙정책연구실 주임 장진췐(江金權)이 모두 불참했다. 그들 두 사람을 대체한 인물은 부총리 허리펑(何立峰), 중앙판공청 상무부주임 멍샹펑(孟祥鋒), 그리고 중앙정책연구실 상무부주임 탕팡위(唐芳裕)이다. 최고지도자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부(副)"로 바뀌었다. 위대한 지도자의 수행인원의 격이 낮아진 것이다.

차이치가 아픈 것은 아니었다. 그는 5월 16일, 17일 이틀간 탕산(唐山)을 순시했고, "팔항규정"을 얘기했다. 시진핑의 고찰시간과 겹치지도 않았는데(만일 겹쳤더라면 탕산을 가는 날짜를 바꿀 수 있었다), 그는 시진핑을 따라가지 않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차이치의 탕산에서의 강연에서 "시핵심"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양개확립" "양개유호"도 말하지 않았다. 차이치가 관장하는 것은 전국의 선전인데, 그 자신이 이미 "시핵심"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니 관영매체도 보도하지 않는 것이다.

전진망(前陣網)에는 중앙판공청이 5월 5일 하달한 11호 문건이 올라왔다. 제목은 <극좌사상이 현재의 업무대국을 간섭하는 것을 방지하는데 관한 통지>이다. 문건내용은 직접적으로 최근 들어 당내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극좌사조를 겨냥해서, 개인숭배, 형식주의 및 정치운동이 경제발전을 대체하는 경향을 비판하고, 이것은 시진핑을 비판하는 노선이 아닌가? 정상적인 상황하에서라면 이런 문건은 차이치라는 중앙판공청주임이 하달하는 것이다.

차이치가 배를 갈아탔다는 것일까? 시진핑과 선을 긋는다는 뜻일까?

8. 베이징기율검사위서기가 신차(新茶)와 종자(粽子)를 가지고 런즈창을 찾아가다.

내부인사의 소식에 따르면, 최근 베이징시 기율검사위서기 천젠(陳健)이 2근의 신차와 단오절 종자 및 기타 보양식품을 가지고 감옥으로 런즈창을 찾아갔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여론을 폭발시켰다. 왜냐하면 이 사건의 정치적 함의는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런즈창은 북경의 부동산거물이다.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할 말은 다하는 의견영수(意見領袖)이며 인터넷인플루언서이다. 또한 홍얼다이(紅二代)이기도 하다. 2020년 3월, 제로코로나, 도시봉쇄방역정책 및 시진핑의 각종 시대를 역행하는 조치들에 극히 불만을 품고, 직접적으로 시진핑을 거명하지는 않으면서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비판했다. 3일후 런즈창은 신비스럽게 실종되고, 반년후 부정부패, 공금유용등의 죄목으로 유기징역 18년. 벌금 450만위안의 형을 받는다.

이번에 런즈창을 찾아간 베이징 기율검사위서기 천젠은 2021년 11월 취임했고, 당시의 베이징시위서기는 차이치이다. 그러므로, 천젠은 마땅히 차이치가 신임하는 인물이다. 그는 런즈창이 형을 받은 후 비로소 베이징 기율검사위서기가 되었다. 직접적으로 런즈창 사건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현재 그와 같은 신분, 그와 같은 직급의 인물이 선물을 가지고 런즈창을 만나러 가다니, 정치적인 의미가 너무나 농후하다. 반시진핑투사를 이렇게 후하게 대접하다니 유일하게 설명가능한 것은 이미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고, 시진핑의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차이치와 그의 부하마저도 배를 바꿔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