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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연상(Lenovo)

쑨홍빈(孫宏斌): 감옥에 보내어진 롄샹의 후계자

by 중은우시 2009. 2. 6.

글: 사어(魚)

 

1984년 11월 롄샹(聯想)이 설립된 이래, 한카(漢卡)사업으로 일어선 롄샹은 중관촌에서 금방 지명도를 얻어갔다. 1988년 1월이 되어서는 원자바오가 시찰을 오기도 했다. 당시의 원자바오는 중공중앙서기처의 후보서기였다. 1989년, 옌샹은 첫번째, PC를 내놓았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로 롄샹은 다시 홍콩에 Quantum회사를 설립했고, PC사업의 발전을 꾀했다. 류촨즈(柳傳志)는 이때 홍콩과 대륙을 뻔질나게 오갔고, 업무에 시달리다가 천천히 메니에르병(메니에르병은 두통, 어지럼증, 메스꺼움, 구토, 이명등의 증세를 보인다), 류촨즈의 주요한 증상은 두통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창업했던 많은 동지들중에서 어떤 사람은 반목하여 원수가 되고, 어떤 사람은 투지를 상실해서,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과제가 바로 새로운 사람을 배양하는 것이었고, 롄샹에 새로운 피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슌츠(順馳)부동산의 창업자이기도 한 쑨홍빈은 1989년에는 롄샹의 그저 보통판매사원이었다. 다만 그는 일에 집착이 강하고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죽어도 그만두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좋은 실적을 거두고 있었다. 1989년 10월, 그는 기업부경리로 임명된다. 그리하여 한카와 PC제품을 전국에 판매하는 업무를 책임진다. 쑨홍빈은 나중에 슌츠부동산을 설립하여 발전이 아주 빨랐는데, 그가 단기간내에 공사대금을 회수하고, 죽어라 땅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그가 만든 슌츠부동산은 몇년만에 완커(萬科)를 위협할 판매실적을 낼 수 있었다. 쑨홍빈은 고삐풀린 망아지와 같이 눈에 보이는게 없는 상태였다. 그는 감히 왕스(王石)과 같은 최고수준의 기업가에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2004년 3월부터 국가가 거시조절을 시작하면서 슌츠부동산의 발전도 지체되고, 결국 위기가 발생하여 주인이 바뀌게 된다.

 

쑨홍빈의 슌츠부동산에서의 일을 이렇게 상세히 얘기하였으니, 이제 그가 롄샹에 있던 시절로 돌아가보자. 류촨즈는 홍콩의 일로 바빴고, 그리고 당시 전국적인 지점네트워크를 갖추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이든 창업원로들은 모두 북경에 남아있으려고 하는 바람에 계획집행이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25살된 쑨홍빈이 기업부경리를 맡은 후, 열혈청년들을 이끌고, 2개월만에 13개의 지점을 만들게 된다. 그리하여 재고로 쌓여있던 제품 1000만위안어치를 팔아버리고, 롄샹의 숨통을 틔워주게 된다. 쑨홍빈의 명망은 바로 올라간다. 그러나 원로급 인물들의 불만에 부닥친다. 제품공급을 책임진 업무부경리는 자주 쑨홍빈의 업무에 제동을 걸었다. 류촨즈는 결심을 내려, 업무부경리를 끌어내리고, 기업부와 업무부를 합병시킨 다음 쑨홍빈이 모두 관장하게 한다. 류촨즈는 그 후에 홍콩의 일을 안심하고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쑨홍빈은 높은 기대를 받고 있었으며, 이미 롄샹의 후계자로 자리잡았다. 류촨즈는 여러번 공개적인 자리에서 쑨홍빈을 칭찬하고 그의 권위를 세워주었다. 이 해에 나중에 롄샹의 후계자가 되는 양웬칭(楊元慶)이 입사한다.

 

쑨홍빈의 업무가 발전함에 따라, 그는 욕심이 점차 팽창한다. 그리하여 자기 편을 끌어모으고 파벌을 형성한다. 인사관할을 우회하여 자신의 심복을 중요한 자리에 심어둔다. 전국의 13개 지점의 총경리는 모두 그가 직접 선발한 사람들이었다. 모두 그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교육훈련계획에 따라, 새로 직위를 맡은 사람들은 쑨홍빈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점차 쑨홍빈의 명망은 높아지면서, 점점 사람들에게 한 가지 생각을 갖게 하였다. 류촨즈의 곁에 있는 나이든 사람들은 모두 멍청하고, 젊은이들이 제대로 일을 하려는데 자주 방해해서,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고, 쑨홍빈이 중관촌의 최고 경영자이고, 쑨홍빈만이 롄샹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쑨홍빈은 기업부에서 내부간행물을 만드는데, <<롄샹기업보>>였다. 당시 롄샹의 내부에는 <<롄샹보>>라는 내부신문이 있었다. <<롄샹기업보>>에 "기업부강령"이라는 글이 실린 적이 있는데, 그 제목은 바로 "기업부의 이익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류촨즈는 우연히 이 간행물을 보게 되는데, 류촨즈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민감하게 깨닫는다. 그리하여 바로 북경으로 돌아와서 상황을 파악한다.

 

북경에 온 후에, 류촨즈는 조심스럽게 정보를 수집하였는데, 수집된 정보는 그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1990년 3월 19일, 롄샹의 고위간부회의가 소집된다. 그 자리에서 쑨홍빈이 파벌행동을 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행동하는 것을 질책했다. 쑨홍빈은 아마도 키울 수 있는 인재이지만, 아마도 회사에 아주 위험한 인물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쑨홍빈은 오만하게 들은체 만체 하였다. 4월 4일, 쑨홍빈을 기업부에서 다른 곳으로 보내어 그가 세력을 키우지 못하게 막고, 쑨홍빈이 잘못을 깨닫고 절벽에서 말고삐를 당기기를 희망했다. 한번은 기업부의 회의때, 갈등이 폭발한다. 젊은 직원들은 쑨홍빈을 결사적으로 옹호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우리는 쑨홍빈의 지시를 직접 받았다. 쑨홍빈이 우리를 욕하더라도 우리는 달게 받았다. 그게 총재와 무슨 상관이냐?" 그 회의에서 류촨즈는 직원들에게 당하고 나서 분노가 극에 달한다. 그날 저녁, 쑨홍빈은 지점의 돈은 다른 곳으로 옮긴다. 당시 쑨홍빈의 수중에는 개략 1700만위안의 대출이 있었다. 류촨즈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북경 공안국과 검찰원에 고발을 하고, 쑨홍빈은 구금된다. 1년후에 법원에서 판결을 닫는데, 공금유용죄로 5년형을 받는다. 이렇게 하여 원래 롄샹의 후계자였던 그는 류촨즈에 의하여 감옥에 보내어지게 된다.

 

쑨홍빈은 감옥에서의 태도가 좋아서, 1년일찍 출감한다. 나중에 슌츠부동산을 창업한다. 재미있는 일은, 쑨홍빈이 슌츠부동산을 설립할 때의 50만위안의 자금은 류촨즈가 준 것이라는 점이다. 이 50만위안을 준 것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류촨즈가 그의 재주를 아껴서라고 한다. 그래서 쑨홍빈에게 50만위안을 투자한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류촨즈가 그의 마음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쑨홍빈은 보통내기가 아니고, 5년의 감옥생활로 원한이 깊을 것이라는 것이다. 쑨홍빈이 나중에 류촨즈에게 보복을 하거나, 혹은 이전에 회사의 내막을 공개하는 등의 경우에는 아마도 류촨즈 본인은 물론이고 롄샹에도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칠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