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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태염)

장태염(章太炎)의 공개구혼

by 중은우시 2008. 12. 16.

글: 월초(越楚)

 

신해혁명후에 당시에 영향력이 비교적 큰 <<순천시보(順天時報)>>에 <<징혼계사(徵婚啓事)>>가 실렸다. 이를 실은 사람은 대명이 자자한 장태염이었다. 그 내용은 개략 다섯 가지였는데,

 

(1) 악녀(鄂女, 호북성출신여성)에 한함

(2) 대가집 규수일 것

(3) 문리(文理)를 통했을 것

(4) 학교에서 평등자유의 악습에 물들지 않았을 것

(5) 남편을 따르는 미덕이 있을 것

 

이 공개구혼이 실리자, 사회의 여론이 비등했다. 하나는 장태염이 아마도 가장 먼저 신문에 공개구혼을 낸 사화명사라는 것 때문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태염이 악녀(호북여자)만을 처로 삼겠다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 연유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장태염은 중국근대사상 두번째로 "미치광이"로 이름을 날린 명사이다(또 다른 한명은 양정분(梁鼎芬)이다). 이 절강성 여항(餘杭)출신의 인사는 이름이 병린(炳麟)이고, 자는 매숙(枚叔)이며, 호는 태염(太炎)이다. 청말민초의 저명한 국학대사이고, 광오하고 솔직한 성격은 삼국시대의 일대광사(一代狂士) 미형에 비교할 만하다. 그는 일찌기 캉유웨이, 위안스카이, 리위안홍, 그리고 쑨원, 황싱을 욕한 바 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생각도 못한 행동을 하곤 했다. 장태염의 원래 부인인 왕씨는 1903년에 병으로 죽는다(일설에는 1902년). 그 후에 그는 홀아비로 지냈는데, 신해혁명후에 장태염은 친구들의 강권을 견디다 못해 재취할 생각을 품고 공개적으로 신문에 구혼광고를 낸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징혼계사>>의 마지막 두 가지는 장태염이 나중에 수정했다고 한다. "부부평등, 남편이 죽으면 개가할 수 있다. 마음이 맞지 않으면 이혼할 수 있다"로 고쳤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식후의 얘깃거리가 된다. 사실, 장태염은 무창(武昌)에 있는 동안, 일찌기 예쁘고 풍류적인 신여성 우슈칭(吳(淑卿)을 마음에 두었었다. 그리하여 개인적으로 리위안홍(黎元洪)에게 중매를 서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미 우슈칭과 리위안홍은 서로 뜨거운 사이였다. 리위안홍은 자연히 얼버무리면서 장태염을 쫓아보냈다. 장태염이 결국 취한 여인은 탕궈리(湯國黎)인데 악녀(호북여인)가 아니라, 절강 오진 사람이었다. 단지 7살때부터 9살때까지 부친을 따라 한커우(漢口)에서 장사를 하는 숙부의 집에 산 적이 있으니, 호북에서 2년은 생활한 셈이다. 장태염과 탕궈리의 결혼은 1913년 6월 상해에서 거행된다.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주례를 보고, 쑨원(孫文), 황싱(黃興), 천치메이(陳其美)등이 모두 참석하여 축하를 해주었다. 이 때 장태염이 45세이고, 탕궈리가 30살이었다.

 

그렇다면, 장태염이 <<징혼계사>>에서 왜 호북여인이 한한다고 하였을까? 일설에는 장태염이 "호북은 의거를 처음 일으킨 곳이므로 여자들도 비범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다른 일설에는 "상녀다정(湘女多情), 악녀다음(鄂女多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녀다정"이라는 것은 상비죽(湘妃竹)과 관련이 있다. 순임금이 남순할 때 사망하여 영릉에 묻혔는데, 그의 비인 아황과 여영이 남편을 찾아 천리를 와서, 눈물을 흘려 상죽(湘竹)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그리하여 후세에 "상녀다정(호남의 여인은 정이 많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악녀다음"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이런 말이 전해진다. 1914년, 장태염이 북경으로 가서 위안스카이에게 연금되었을 때, 위안스카이는 호기심에 장태염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왜 악녀가 아니면 취하지 않겠다고 했는가?" 그러자 장태염의 대답이 "상녀다정, 악녀다음"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덧붙여, "호북인들의 발음에는 많은 고음이 남아 있다. 본인은 바로 고음을 연구하는 자이니, 만일 호북여인을 처로 맞이한다면, 자연히 진진지호(秦晉之好)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소문이 사실인지 여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호북의 말중에 고대 초나라 말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언어학의 대가인 장태염은 한 때 우한(武漢)의 발음을 한어의 표준음으로 삼자고 주장한 적이 있다. 장태염이 호북의 언어를 좋아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호북여인을 부인으로 삼아 매일 호북말을 듣고 싶어했을 수 있다. 아마도 한커우에서 2년간 생활한 적이 있는 탕궈리는 한커우말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