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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태염)

장태염(章太炎)의 정치병

by 중은우시 2008. 2. 7.

글: 장명(張鳴)

 

장태염은 지금 국학대사(國學大師)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청말민초(청나라말기부터 민국초기까지)에 그의 명성이 가장 컸던 시기에 그는 혁명가였고, 정치가였다. 그저 그는 정치가라는 것이 책무더기에서 기어올라온 것이므로 요란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하지는 못했다. 엉망진창이었다. 그의 제자가 이런 말을 한 바 있다: "스승은 학자이다. 학문을 얘기하면 졸았지만, 정치를 얘기하면 눈썹이 날리며 눈이 반짝였다." 다만 정치에서 왕왕 마음내키는대로 하는 편이어서, 어떤 때는 동지들마저 반대하며 비웃을 정도였고, 어떤 때는 상대방마저 반대하며 비웃을 정도였다.

 

장태염은 동맹회(同盟會)의 초기 핵심간부였다. 동경에서 민보를 만들 때, 싸움을 아주 잘했다. 만일 그의 사람을 시원스럽게 욕하는 글재주가 없었다면, 혁명당의 성세는 일찌감치 양계초(梁啓超)의 일파에게 눌렸을 것이다. 그러나, 금방 장태염은 손중산과 갈라졌다. 그것도 동지간의 내부다툼정도가 아니라 공개적인 반목이었다. 민국의 초기에 정당은 이합집산이 심했다. 장태염은 열정적이긴 했지만, 항상 동맹회와 국민당의 반대편에 섰다. 그는 손중산을 싫어했고, 황흥(黃興)에게도 흥미가 없었다. 심지어 원래 광복회의 동지들과도 멀어졌다. 그런데, 오히려 신군의 병사들이 침대밑에 숨어있던 것을 발견해서 끌어내서 앞장서게 된 여원홍(黎元洪)에게는 아주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가 후처를 고를 때도 반드시 호북사람을 취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원세개가 국민당을 압박할 때, 장태염과 그가 속한 공화당은 방조범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수수방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원세개가 원하는대로 정식 대총통이 되고나자, 더 이상 국회라는 선거메커니즘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국민당의원의 증서를 반납받으면서, 실질적으로 국회를 폐지하고자 했다(반수를 구성하지 못하면, 개회할 수가 없었다), 이때서야 의회정치를 갈구하던 양계초와 장태염은 꿈에서 깬 듯이 원세개의 본모습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나무는 변해서 배가 되었으니(木已成舟), 후회해도 늦었다.

 

그러나, 장태염은 양계초가 아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중하(중국)에 빛 한줄기를 남기기 위해" "위기국면을 만회하기 위해"(장태염이 제자와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말) 신혼의 달콩함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던 그는 의연히 자기의 집을 떠나 북경으로 북상하여, 원세개를 찾아가서 끝장을 보려고 한다(이때가 1913년 12월임). 그리하여 그의 제자인 노신이 묘사한 것과 같은 일막이 벌어진다: 대훈장을 부채장식물로 삼고, 총통부에서 소란을 피운다. 당시의 <<신보>>(1914년 1월 14일)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장태염은 손에 둥근부채를 한자루 들고 아래에는 훈장을 매달고 낡은 관화를 짓밟으며 총통을 만나게 해달라고 소리질렀다. 승선관이 길을 막자 미친 듯이 소리지르며 소란을 멈추지 않았다. 관방의 기재에 따르면 장태염은 욕을 했을 뿐아니라 기물도 부수었다.

 

장태염이 이렇게 성질을 부리자, 원세개는 아주 난감했다. 다시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대외적으로 장태염이 미쳤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경성의 헌병두목인 육건장의 수하로 하여금 끌고가서 병을 치료하도록 했다. 실질적으로는 연금이었다. 이때부터 2년에 걸친 연금생활이 시작된다.

 

장태염은 연금당하기는 했지만, 돈은 마음대로 썼다. 장태염의 부인인 탕국리(湯國梨)에 따르면, 장태염이 연금당한 기간동안 매월의 비용이 500위안이었다(당시 경찰의 매월 월급이 4위안, 대학의 가장 유명하 교수가 받는 월급도 매월 400위안을 넘지 못했다). 이 시기는 아마도 그가 가장 통크게 돈을 쓴 시기였을 것이다.

 

비록 대우는 좋았지만, 연금은 연금이다. 이것은 장태염이 소란을 피운데 대한 징벌일 뿐아니라, 원세개에 있어서는 장래에 있을지도 모를 '불안정요소"를 제거한 것이기도 했다. 당연히 장태염은 고분고분하지 않았고, 계속 소란을 피우고자 했다. 당시의 조건으로는 글을 쓸 수도 없고, 욕밖에 못하는데, 원세개에게 들리지도 않았다. 할 수 없이 주변의 경찰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장태염은 가난한 서생이고, 평생 돈이 없었으며, 생활은 검박했다. 그러나, 연금기간동안 한꺼번에 십여명의 요리사와 하인(비록 모두 경찰이 분장한 것이기는 하지만)을 두었다. 그리고, 주인어른의 행세를 했으며, 이들에게 자기를 "대인"이라고 부르게 했고, 그의 손님이 오면, "어르신"이라고 부르고, 만나면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라고 시켰다. 매월 15일에는 그에게 절을 하도록 시켰고, 잘못을 범하면 꿇어앉게 하거나 벌금을 내도록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경찰에게 모욕을 주려고 했고, 심지어 이들(경찰)에게 이러한 조건들을 적어서 서명하고 날인하게 하였다.

 

경찰들을 놀리면서 화를 풀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원세개에까지 닿지는 않았고, 심지어 육건장, 주계검에게도 닿지 않았다. 같혀 있으면서 아무리 대인 노릇을 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화를 참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장태염은 단식을 시작한다. 그러나, 장태염은 고집도 세고 미치기도 하였지만, 이때의 단식은 진짜 죽기를 각오하고 한 투쟁은 아니었다. 이를 빌어 소란을 피우려는 것뿐이었고, 원세개에게 불리한 여론을 조성하여, 간웅 원세개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장태염의 단식을 중단되기도 하고 계속되기도 하였다. 1년여동안 죽지 않았다. 단식을 하지 않을 때는 은으로 된 식사도구를 썼다. 말로는 원세개가 독을 넣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장태염의 연금은 원세개가 황제에 오르는데 실패하고 물러난 다음에야 끝이 난다. 이 기간동안 비록 원세개는 공개적으로 욕하는 혀 하나는 막아놓았지만(양계초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장태염은 이로 인하여 자신의 잘못을 씻을 수 있었다. 민국초기에 속았던 경력을 아무도 언급하지 않게 된 것이다. 자신의 이미지를 예전의 휘황함으로 되돌리는데 성공했다. 그의 제자들이 그에 관한 역사를 언급할 때에 이 시기의 경력은 거의 전설적이 되어 버렸다.